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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의 구급일지 Part 7 - 축첩(蓄妾)

부산 부산진소방서 이재현 | 기사입력 2020/11/20 [10:00]

이재현의 구급일지 Part 7 - 축첩(蓄妾)

부산 부산진소방서 이재현 | 입력 : 2020/11/20 [10:00]


축첩(蓄妾)이라는 관습이 있었다. 일부다처제를 허용하지 않는 대한민국이지만 예전엔 후첩을 두는 경우가 종종 있어 남편을 남편이라 부르지 못하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쩌다 첫째 부인이 사망해 둘째 부인이 그 자리를 꿰차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해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외로이 살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엊그제 타 관내 한 아파트에서 심정지 환자가 있다는 지령이 내려왔다. 관할 구급차는 다 어디 가버려서 멀리 있는 우리 구급차와 인근 특별구급대, 관할 펌프차가 동시에 현장으로 출동했다.


하지만 선착은 언제나 내 몫. 우리 구급대가 먼저 승강기를 타고 현장에 올라갔다. 침대 위에는 새하얀 백발의 할머니가 고이 누워계셨다. 아흔은 족히 넘어 보이시는 할머니는 작은 키에 뼈가 훤히 보일 정도로 마른 상태라 사실 한눈에 소생 가능성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기장판의 콘센트를 빼내고 제세동기를 붙였다.


‘삐이이이----’


Asystole 제세동기 모니터에는 심장의 전기적 활동이 없다는 한 줄이 나타나고 있었다. 보호자인 중년의 여성에게 할머니의 상태를 말씀드리고 소생술을 원하시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올해 96세고 지병이 많아 소생술은 원치 않는다고 하셔서 할머니의 옷매무새와 자세를 바르게 가다듬고 이불을 덮어드렸다.


절차대로 의료지도 의사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소생술 유보, 경찰인계를 하려던 중 보호자에게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아버지의 후첩이라 본인과 ‘동거인’으로 돼 있다는 거였다.


아… 지금이야 미혼모의 자녀로 호적을 등록하거나 원하면 부친의 혼외자로 등록할 수 있었지만 예전엔 그러지 못했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그냥 살아오신 분들도 제법 있었으니까.


어쨌거나 보호자인 친딸은 등본상 ‘동거인’인 수양딸이어서 친어머니의 소생술 유보에 대한 법적 권한이 없는 거였다. 직접 배불러 낳은 아들과 딸이 있지만 할머니에게 법적인 직계비속은 한 명도 없었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의료지도 의사는 우리에게 소생술을 하며 응급실로 이송하라고 지시했다. 보호자에게 소생술 유보를 할 수 없어 어르신을 이송해야 한다고 설명해 드렸다. 때마침 경찰이 와서 또 엉뚱한 얘기를 한다.


“변사사건이고 명백하게 사망했는데 왜 119가 이송을 하나요? 현장 보존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안 그래도 그간 서러운 일이 많았을 텐데 친어머니가 돌아가셔도 무엇 하나 결정하지 못하는 현실 때문인지 보호자가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환자를 받아줄 병원을 여기저기 알아보다 겨우 한 병원의 응급실로 이송할 수 있었고 병원에 도착해서야 사망 판정이 내려져 우리의 역할은 끝이 났다.


보호자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해드리고 앞으로의 절차를 설명한 후 돌아왔다. 중년의 여성은 얼굴에 울음이 가득한 채 종종걸음으로 응급실 밖까지 나와 고개를 한참이나 숙여 연거푸 인사를 하셨다.

 

부산 부산진소방서_ 이재현

 

<본 내용은 소방 조직의 소통과 발전을 위해 베테랑 소방관 등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 2019년 5월 창간한 신개념 소방전문 월간 매거진 ‘119플러스’ 2020년 11월 호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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