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목항으로 기수를 돌린 3호 헬기가 착륙하기 전 상공에서 바라본 팽목항은 지어진 지 얼마 안 돼 보였다.
소방용과 다른 기관의 것으로 보이는 텐트들, 소방ㆍ경찰차 그리고 구급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방송국 차량도 보였다. 이런 상황으로 보아 세월호 침몰사고 보도 후 시간이 흘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바다 구조작업은 소방 관할 구역이 아니라서 우리가 주도하에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렇지만 300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헬기 문을 열고 팽목항을 걸어 내려오면서 순간 짜증이 밀려왔다.
수중수색 준비
오후 7시께가 돼서야 팽목항으로 중앙119구조본부 차들과 보트, 수난 장비가 도착했다. 시도에서 선발된 구조 잠수 대원들도 왔다. 당시 소방방재청장 지시하에 중앙119구조본부 소속 직원들이 해경 3009호 함의 소방 연락관으로 투입됐다.
다음날은 해경과 수중수색 대원들을 투입하기로 협의가 이뤄졌다. 오후 9시가 돼서야 자체 수색구조 회의를 하고 수중수색 대원 조 편성도 마쳤다. 크레인 차가 오후 9시 40분에 도착해서 오후 10시에 다목적 구조 보트 두 척을 해상에 접안할 수 있었다.
그중 한 척은 미국에서 직접 수입한 다목적 구조 보트다. 바다에서 사용할 수 있는 항법장치가 장착돼 있고 일반적으로 소방에서 사용하는 보트에 비해 파도에 안전하다. 이 보트가 없었으면 6개월간의 세월호 구조 임무는 어려웠을 거다.
소방이 해상에서, 특히 육지와 먼 거리에 떨어진 곳에서 장기간 구조작업을 하지 않을 거란 내 생각은 오판이었다. 보트 구입 당시엔 말도 많았다.
직원들이 보트를 검수하면서 인천 해상에서 장거리 보트운영 교육을 받았다. 그 교육이 많은 도움이 됐다. 오후 11시 30분이 돼서야 중앙119구조본부 CP 설치를 완료했다.
다시 현장으로 다목적 구조 보트로 사고 현장까지 이동했다. 그 이후 해경 경비함으로 옮겨 타 중앙해양특수구조단 대원들과 수색작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중앙해양특수구조단장과 대원들은 그 전부터 안면이 있던 사이라 대화가 잘 됐고 현장 정보도 많이 알려줬다.
사고 당일 해경 구조대원들은 “세월호 선체와 라인 작업은 완료했는데 조류가 빠를 땐 5노트 이상도 나와 수중수색하기가 어렵다”고 전해줬다. 바다 조류가 5노트라니 이건 빠른 정도가 아니라 강의 급류 수준이다. 그래서 정조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바다는 우릴 도와주지 않았다. 높은 풍랑으로 인해 수색작업은 이뤄지지 못했다. 바다에서의 구조 활동은 특히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래서 구조 활동을 할 때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은데 그중에 가장 영향이 큰 게 풍랑이다. 그렇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때 언론에서는 선체에 아직 에어포켓이 있어 생존 가능성이 있고 잠수사 수백 명이 투입됐다고 보도했다. ‘The Poseidon Adventure’라는 미국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거꾸로 뒤집힌 유람선이 반은 물에 잠기고 반은 차지 않아 탈출하는 과정을 다룬다.
‘혹시 뉴스를 보는 국민이 이 영화처럼 넓은 공간의 에어포켓이 있을 거라고 착각하지 않을까?’
우려됐다.
또 언론에서는 수백 명의 잠수사가 투입됐다고 했는데 그렇지도 않았을뿐더러 수백, 수천 명의 잠수사가 온다고 한들 정조 타임에 맞춰 수중수색하는 건 불가능하다.
언론은 이런 큰 재난 현장 보도를 사실에 근거해 더 정확하게 국민에게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뉴스를 접하는 국민이 동요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분노 풍랑으로 인해 장비를 다시 준비하고 있는데 직원이 급하게 나를 불렀다.
“본부장님이 찾으십니다. 빨리 CP로 가보십시오”
어떤 연유로 나를 찾는진 모르지만 ‘빨리’라는 소리에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CP로 들어갔는데 젊은 남자 두 명과 여자 한 명이 앉아 있고 여러 명이 그 뒤에 병풍처럼 서 있었다. 그중 한 명은 나도 안면이 있는 사람이다.
‘이건 무슨 상황이지?’
속으로 생각하는 순간 본부장이
“한 주임 앉아 있는 분들이 심해 다이빙을 하시는 분들인데 이분들이 우리에게 헬륨과 부스터 펌프, 공기 충전기 지원을 원하셔. 지원 가능해?”
“본부장님, 부스터 펌프와 공기 충전기는 지원 가능한데 헬륨은 저희가 사용할 것도 부족합니다”
단호하게 말했다.
그랬더니 뒤에 병풍처럼 서 있던 다수의 사람이 공격적으로
“아니, 소방은 그런 기체와 장비가 있으면서 여태껏 뭐했습니까?”
“이분들 지원해주고 수색하게 하세요”
앉아 있던 남자 한 명이
“우리는 테크니컬 다이버고 외국에서 교육도 받았습니다. 더블탱크와 수중에서 수색할 수 있는 수중 스쿠터도 있어요. 대심도 잠수를 하려면 헬륨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얘기를 해도 나는 “헬륨은 안 된다”고 했다. 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실종자 가족들이 들고 일어섰다. 잘못하면 본부장부터 멱살을 잡히고 아수라장이 될 상황까지 치달았다. 그 순간 본부장이 “한주임, 이분들 다 지원해 드려”라는 말이 나왔고 그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CP 밖으로 나오면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나도 테크니컬 다이버라 자부해서 국내 웬만한 다이버들은 다 아는데 두 명은 들어본 적도, 본적도 없는 인물이다. 안면이 있던 한 명이 나를 찾아와 미안하다고 하는데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나도 따져 물었다.
“아니, 테크니컬 다이빙을 한다면서 진도에 헬륨이 있다고 생각해 장비만 갖고 온 겁니까? 그래서 지금 수색작업을 해야 할 우리에게 헬륨과 장비를 지원해 달라는 게 말이나 됩니까? 다이빙을 한다는 사람들이 지금 바다 환경이 어떤지 어떻게 들어가야 하는지 확인도 안 해보고 옵니까?”
자원봉사로 왔다지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는 테크니컬 다이버로 불리길 좋아한다. 그런데 테크니컬 다이버라면서 이런 행동을 한 그들이 이름을 알리려고 하는 것 외에는 올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내가 그렇게 얘기해서인지 아니면 심적인 변동이 있는 건지, 해경이 다이빙을 막은 건진 알 수 없지만 결국 헬륨과 장비 지원은 하지 않았다.
지금은 레저 다이빙 리조트에도 더블탱크와 나이트록스, 트라이믹스를 할 수 있는 곳이 많다. 하지만 당시엔 장비가 갖춰진 곳이 드물어 장비를 다 갖고 다녀야 했다. 기체도 그랬다.
그때 젊은 남녀는 지금은 꽤 이름난 테크니컬 다이버 강사가 돼 있다. 소방에서도 배운 사람이 많다. 그 이후 바다에서 몇 번 봤지만 모른 척해서 굳이 나도 그때의 일을 되새기고 싶지 않아 모른 척했다.
첫 실종자 인양 사고 4일 차 4월 19일 토요일이다. 팽목항은 이제 세월호 사고 현장으로 가기 위한 베이스캠프가 됐다. 아마 이 사고가 없었으면 꽤 조용한 항이었을 텐데 당시엔 모든 국민의 이목이 이곳에 집중됐다.
사고 현장은 ‘맹골수도’로 우리나라에서 조류가 세 번째로 강한 곳이라고 했다. 그래서 정조 시간 외에는 구조 잠수가 불가능하다. 우리가 새벽부터 간다고 해도 구조작업을 할 수가 없다.
해경에서 요청을, 정확히 말하면 잠수 가능 시간을 말해주고 허가가 나면 소방이 투입된다. 그래서 이날은 오전 8시 5분에 투입됐지만 잠수를 못 하고 돌아왔다가 오후 4시에 다시 투입됐다.
그리고 오후 5시 44분에 사고 선박 식당 쪽으로 설치된 네 번째 라인을 통해 입수했고 실종자 1명을 인양했다.
이게 소방의 첫 구조 잠수였고 첫 실종자 인양이다. 나흘째가 돼서야 처음 구조 잠수를 한 것이다. 두 명의 대원에게 선박 내부 상황을 들어봤다.
“그냥 한마디로 끔찍합니다. 실종자들이 뒤엉켜 있어요”
독자들과 수난구조에 관한 다양한 얘기를 나누고 싶다. 사건ㆍ사례 위주로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자 한다. 만일 수난구조 방법에 관해 궁금한 점이 있다면 e-mail : sdvteam@naver.com facebook : facebook.com/chongmin.han로 연락하면 된다.
서울119특수구조단_ 한정민
<본 내용은 소방 조직의 소통과 발전을 위해 베테랑 소방관 등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 2019년 5월 창간한 신개념 소방전문 월간 매거진 ‘119플러스’ 2023년 11월 호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FPN(소방방재신문사ㆍ119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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