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 마을 사고가 발생하고 한 달이 지났지만 바지선의 민간 잠수사들이나 상주하는 근무자들에게 필요한 물품과 식자재가 충분히 보급되지 않아 잠자리나 식사가 부실했다.
한 달 넘도록 식사는 진도에서 오는 도시락으로 해결했는데 일회용 팩에 밥과 반찬 몇 개가 전부였다. 나는 정식적인 식수 인원이 아니라 투정 부릴 처지가 아니었다.
당시엔 그저 끼니를 때울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하지만 지금 와 돌이켜 보니 ‘우리 본부나 소방청에서 정식 협조를 요청했으면 눈칫밥을 먹지 않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있다.
JTBC 등 언론에서 ‘열악한 잠수사의 실태’라는 타이틀의 뉴스가 방송되면서 상황은 급반전되기 시작했다. 방송 후 얼마 되지 않아 해경 경비정은 피자와 치킨, 과자 등 정말 엄청난 양의 간식을 싣고 와서 바지선에 쏟아부었다.
잠수사와 근무자들이 다 못 먹어 해경과 해군에게도 나눠줬는데 아직까지 그만한 양의 간식을 본 적이 없다. 해경 경비정은 그 이후에도 가끔 들어와서 바다 한가운데 고립돼 접하지 못할 간식들을 맛볼 수 있게 해줬다.
컨테이너들이 바지선에 추가되면서 민간 잠수사들의 숙소가 예전보다 나아졌다. 바지선에서 취사가 가능해져 수색 작업에 참여하는 해경이나 해군들이 먹고 가곤 했다. 위성 방송도 설치돼 구조 작업이 끝나고 쉴 때 TV를 시청할 수 있어 좋았다.
하지만 모든 언론에서 앞다퉈 세월호 관련 뉴스를 쏟아냈고 현장 상황과 왜곡된 보도들이 많아 대부분 뉴스를 보지 않았다. 언론을 신뢰하지 않기 시작한 시기가 그때부터인 것 같다. 언론은 사람들을 자극하고 본인들의 입맛에 맞게 방송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는데 그 마음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또 자원봉사자로 나선 한의사와 물리치료사들이 주 1회 정기적으로 방문해 진료와 물리치료를 해줬다. 이때가 되면 진료 컨테이너는 항상 붐볐고 나도 꼭 이용했다. 이렇게 바지선은 하나의 마을처럼 변해갔다.
이해되지 않는 인사 풍랑주의보가 내려 바지선이 목포항으로 피항 가기 전까지 구조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문제는 나 자신이었다.
소방이 이 현장에 계속 있는 게 맞는가에 대한 의문과 회의감 그리고 해경 경비함에서 작업 때 마주치는 직원들의 불만을 들을 때마다 바지선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직원들은 구조 작업 자체가 아니라 현장 밖에서 우릴 바라보는 동료 소방관들의 시선과 뒷담화에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어했다. 초과근무 수당을 더 받기 위해 교대하지 않고 우리만 계속 바지선과 경비함에 머무르면서 구조 작업을 한다는 내용인데 그러니 더 바지선에 있기 싫었다.
나중에 바지선이 피항해 있는 동안 본대로 복귀했을 때 본부장님께 나를 포함한 경비함에 있는 직원들을 교대해 달라고 요청했다. 대체자가 있으면 교체해 준다고 하셨지만 선뜻 지원하는 직원이 없었다. 여러 직원에게 부탁했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못한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바지선과 경비함이 현장으로 복귀하면서 우린 돌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5월 22일 자로 나와 일부 직원이 긴급기동팀에서 항공대로, 한 명은 행정팀으로 발령이 났다. 결국 행정팀으로 발령이 난 직원은 구조 작업에서 빠져야 했다.
세월호 사고 직후 긴급기동팀인 수난반은 출동을 해야 했고 “총력을 다해 구조 작업을 실시하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있던 상황에서 인사이동을 한다는 게 당시도, 지금도 이해되지 않는다.
특히 행정팀으로 간 직원은 내가 많이 의지하고 있었기에 그 허탈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쌓이기 시작한 불만은 계속 나를 부정적인 인간으로 만들어갔다.
안타까운 사고 계절의 여왕인 5월을 하루 남겨둔 30일, 언딘 리베로 바지선 맞은편에 앵커링 해 구조 작업을 하던 88 바지선에서 입수한 잠수사가 세월호 선미 우현 외관 절단 작업 중 사고를 당했다.
긴급하게 대기 잠수사가 투입돼 동료 잠수사와 함께 사고 잠수사를 인양했다. 원인을 알 수 없었지만 폭발음이 들렸다는 것으로 볼 때 작업 중에 폭발이 발생한 것 같았다. 긴급하게 응급조치를 했지만 결국 사망했다. 두 번째 민간 잠수사의 사망 사고다.
평상시 기록용으로 사진 찍는 걸 좋아했는데 바지선에선 임무를 수행하며 보고용 사진을 수시로 찍어야 했다.
그 습관 때문인지 해군 보트에서 CPR 하는 상황을 촬영했다. 사자를 찾기 위해 산 사람이 죽음에 이른다는 건 일반인이 봤을 때도 납득하기 어렵다. 소방에 임용된 후 교육 때 우리가 살아야 구조대상자도 살릴 수 있다고 수없이 들었다. 이 상황은 구조대원의 입장에서도 최악의 상황이다.
두 달 동안에 두 명의 민간인 잠수사가 사망했지만 실종자 수색 방법에 변화는 없었다. 몇 가지 방법이 제시됐지만 실종자 가족들이 원하지 않아서 해수부나 해경에서 바꾸지 못했다. 처음 수색 작업에 투입됐을 땐 한 달을 예상했지만 도무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다.
민간 잠수사의 사망 사고와 더불어 언론에서는 세월호 사고의 문제점, 언딘과 해경의 유착, 언딘 리베로호 바지선 투입이 적정하지 않다는 부정적인 방송과 기사들이 쏟아졌다.
나에게 이런 것들보다 중요한 건 ‘과연 이 수색이 언제 끝날 수 있을까’였다. 실종자를 한 명이라도 더 수색해 인양하고 싶다는 책임감과 사명감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래도 현장에서 바닷속으로 뛰어드는 직원들이 있었기에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때 나를 보며 새삼 다시 깨달았다. 이토록 많은 사람이 차가운 바다에 매장됐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분노했다가 내 아들 또래의 실종자를 인양하며 부모의 마음으로 안타까움과 슬픔으로 한동안 마음이 힘들었다. 두 달이 넘어가면서는 언제까지 수색해야 하느냐는 의구심으로 변해갔다.
이렇게 또 하루가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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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119특수구조단_ 한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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