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부터 전국 소방에서 한국형 응급환자 분류시스템인 Pre-KTAS를 전면적으로 시행했습니다. 이 Pre-KTAS를 마주할 때마다 작년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지난해 소방청에서는 2024년부터 전국 구급대의 환자 분류를 한국형 응급환자 분류시스템인 KTAS(한국형 응급환자 분류 도구)로 실시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9월부터 전국 구급대원 전원에게 KTAS 교육 이수와 자격증 취득을 독려했습니다.
저 역시 교육을 받고 시험을 치렀습니다. 솔직히 무난하게 합격을 예상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문제 자체가 쉬웠고 교육 전에 공부도 해갔기 때문에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험 결과는 불합격이었습니다.
불합격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시험 결과에 승복하지 못했습니다. 시험 봤던 시스템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닌지 의심하고 문제 자체의 신뢰성에 의문을 갖기도 했습니다. 그런 제게 몇몇 분이 이런 조언을 해줬습니다.
“반장님. 이건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것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시스템이에요. 그걸 자꾸 예전에 공부했던 방식으로 풀려고 하니 문제를 맞히지 못하죠. 그냥 철저히 KTAS가 요구하는 지식대로만 시험을 치르세요”
이 말을 듣자 불현듯 예전에 읽었던 책의 구절이 생각나 도서관으로 뛰어갔습니다. 바로 ‘역주행의 비밀’입니다.
‘워싱턴 DC 조지타운 대학교의 로한 윌리엄슨은 금융 위기 당시의 은행을 연구했다. 100개의 은행을 조사한 결과 이사진 중 전문가가 적은 은행일수록 손실이 적다는 것을 발견했다. 전문가 이사진은 위험도가 높은 전략에 이미 깊게 발을 들여놓아 기존의 전략을 거스르는 새 전략을 짜지 않았다. 반면 전문 지식이 적은 사외이사들은 위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을 구상해 은행의 손실을 줄일 수 있었다’(p. 29)
이 책은 꽤 많은 페이지를 할애해 인간이 자주 하는 실수인 자신이 가진 정보와 경험만을 신뢰하고 그것들을 일반화해 다른 변화 가능성을 차단하는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또 ‘인간은 미약한 삶의 경험으로 많은 것을 단정하고, 일반화하여 기회의 요소들을 놓친다.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새로운 현실에 과거의 경험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다’라며 과거의 경험에 갇힌 사람이 얼마나 위험한지 이야기해줍니다.
그건 바로 제 이야기였습니다. 과거에 공부했던 응급구조학의 지식과 환자를 상대했던 경험을 새로운 변화인 KTAS에 그대로 적용하려 했으니 불합격은 자명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만약 나의 현재 상태를 인정하지 않고 내가 가진 것만을 신뢰하려 한다면 결코 KTAS 시험에 통과하지 못할뿐더러 새롭게 변화하는 구급대의 응급환자 분류시스템에도 적응하지 못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이 책을 떠올린 후 스스로 문제점을 솔직히 인정하고 새롭게 적용될 KTAS에 적응할 준비를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미 KTAS 자격증을 취득한 후배들에게 그 노하우를 물어보고 실제로 KTAS를 통해 환자를 분류하는 병원의 응급구조사분들에게도 환자 분류를 어떻게 하는지 문의했습니다.
그리고 며칠에 걸쳐 대한응급의학회가 출간한 KTAS 제공자 매뉴얼을 정독하고 KTAS 시험주관기관 홈페이지 게시판에 들어가 그곳의 정보들을 찾아 공부했습니다. 그렇게 전 스스로 KTAS에 적합한 인물이 되고자 노력했습니다.
이렇듯 KTAS 시험 불합격은 많은 걸 알려줬습니다. 제 편협한 경험이 얼마나 많은 편견을 만들어 냈을지 생각해보는 기회가 됐습니다. 후배들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고 내 말이 후배들의 말보다 옳다는 고집을 버려야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 내 경험은 많은 걸 알려주지만 그와 동시에 언제든 틀릴 수도 있다는 걸 계속 상기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고 많은 경험을 쌓아 유연하면서 개방적인 사고를 하겠다는 나름의 목표도 세웠습니다.
KTAS 시험 불합격을 통해 깨닫고 배운 게 너무나도 많습니다. 어쩌면 KTAS 시험에 떨어진 게 저에겐 행운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추신: 제가 시험을 준비하면서 도움을 받았던 세 분이 계십니다. 경기 남양주소방서에서 근무하시는 박수현 주임님, 경기 일산소방서에서 근무하시는 김영주 주임님, 그리고 충북 단양소방서에서 근무하시는 최상국 주임님… 이 세 분께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폭탄 문자를 보내며 질문했습니다. 분명 지치고 귀찮으셨을 텐데 내색하지 않고 질문에 답을 주신 세 분께 꼭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충북 충주소방서_ 김선원 : jamejam@korea.kr
<본 내용은 소방 조직의 소통과 발전을 위해 베테랑 소방관 등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 2019년 5월 창간한 신개념 소방전문 월간 매거진 ‘119플러스’ 2024년 5월 호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FPN(소방방재신문사ㆍ119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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