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 사이 세계는 이상한 장면을 반복해서 목격하고 있다. 자유무역을 주도하던 나라가 관세를 올리고 동맹을 이끌던 나라가 방위비 청구서를 내민다. 규칙을 만들던 국가가 스스로 그 규칙을 흔들고 질서를 관리하던 제국이 “우리부터 살자”고 말한다. 이 변화는 돌발적인 정책 전환처럼 보이지만 단기적인 정치 이벤트로 설명하기에는 지나치게 일관적이다.
이 지점에서 엠마뉘엘 토드(Emmanuel Todd)의 질문이 다시 의미를 갖는다. 세계는 정말 혼란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익숙했던 질서의 작동 방식이 조용히 종료되고 있는 것인가. 토드는 지금의 국제질서를 ‘붕괴’가 아니라 ‘철수’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문제는 미국의 힘이 사라졌느냐가 아니라 그 힘을 세계를 위해 사용하는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세계는 질서가 무너지고 있는 게 아니라 질서를 관리하던 주체가 물러나는 과정에 있다. 많은 사람은 이를 혼란으로 읽지만 엠마뉘엘 토드는 이 시기를 훨씬 냉정하게 규정한다. 그는 지금의 세계를 “미국이 패배해서가 아니라, 제국으로서의 역할을 더 이상 감당하지 않기로 선택한 이후의 세계”로 본다.
미국은 여전히 압도적인 군사력과 금융력을 보유하고 있다. 문제는 힘의 크기가 아니라 그 힘을 보편적 규칙으로 전환해 유지할 내부 여력이 사라졌다는 데 있다. 제국은 세계를 묶기 위해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동맹을 보호하고 자유무역의 비용을 떠안고 규칙이 자국에 불리하게 작동할 때도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 역할은 힘이 아니라 내부 사회의 안정과 통합을 전제로 한다. 토드가 보기에 미국은 이미 이 전제를 상실했다.
중산층의 붕괴와 교육 격차, 정치적 분열, 사회적 이동성의 정체 속에서 미국 사회는 더 이상 “왜 우리가 남의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이 순간 제국은 팽창하지 않고 수축한다. 트럼프가 상징한 보호무역과 동맹 비용 청구는 새로운 전략이 아니라 이 수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증상에 가깝다. 규칙은 협상의 도구로 바뀌고 동맹은 보험이 아니라 거래가 된다. 미국은 약해진 게 아니라 관리자 역할에서 철수하고 있다.
그렇다면 미국 이후의 질서는 혼란인가. 토드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제국이 사라진 자리에 곧바로 새로운 단일 제국이 등장한 적은 역사상 거의 없다. 지금의 세계는 무질서가 아니라 다극적 미정 상태에 더 가깝다. 규칙은 단일하지 않고 지역마다 다르게 작동하며 질서는 영구적 합의가 아니라 임시적 조정의 집합으로 형성된다. 이 상태는 불안정하지만 반드시 혼란으로 붕괴되지는 않는다.
이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중국의 문제가 등장한다. 중국은 경제 규모와 산업 역량에서 미국의 대안처럼 보인다. 그러나 토드는 중국이 대체 제국이 될 수 없다고 본다. 이유는 단순하다. 제국은 힘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보편적 규칙을 제공하고 외부 세계에 신뢰를 줄 수 있어야 한다. 중국은 강력한 국가지만 보편성을 수출하는 체제는 아니다. 내부 통합을 최우선으로 하는 국가가 외부 세계의 비용을 장기적으로 떠안으며 질서를 관리할 가능성은 낮다. 중국은 중심국이 될 수는 있어도 미국을 대체하는 제국이 되기는 어렵다.
결국 세계는 하나의 중심이 아니라 여러 중심이 느슨하게 공존하는 구조로 이동한다. 이 구조에서 가장 위험한 국가는 약한 나라가 아니라 전략 없이 한쪽에 고정된 나라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은 여기에 있다. 이 수축 국면에서 한국은 주변부로 밀려나는가, 아니면 조정자의 위치를 확보하는가.
한국의 조건은 독특하다. 한국은 제국이 아니고 그렇다고 변방도 아니다. 기술, 제조, 금융, 안보에서 이미 여러 체계에 동시에 연결돼 있다. 문제는 이것이 아직 전략이 아니라 성과의 총합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미국 중심 질서에서는 충성도가 중요했지만 다극 질서에서는 조정 능력이 핵심 자산이 된다. 어느 편에 서느냐보다 서로 다른 규칙 사이를 번역하고 연결하는 능력이 더 중요해진다.
이때 한국이 선택해야 할 길은 명확하다. 첫째, 단일 동맹에 모든 전략을 종속시키지 않는다. 둘째, 규칙을 수동적으로 따르는 소비자가 아니라 부분 질서의 설계자로 참여한다. 셋째, 안보ㆍ기술ㆍ에너지ㆍ공급망을 하나의 패키지로 묶는 국가 전략을 구축한다. 이는 줄타기가 아니라 구조를 읽는 선택이다.
토드의 관점에서 보면 지금 세계는 붕괴 중이 아니다. 역할이 재배치되고 있을 뿐이다. 제국의 시대는 끝나가지만 국가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 과도기에서 중요한 것은 힘이 아니라 어디까지 개입하고 어디서 물러날지를 판단하는 능력이다. 한국이 이 능력을 갖춘다면 주변부는 피할 수 있다. 오히려 조정자의 위치는 제국이 없는 시대에 가장 안정적인 자리일지도 모른다.
지금은 선택의 순간이다. 어느 편에 설 것인가가 아니라 이 틈을 누가 관리할 것인가의 문제다.
김훈 리스크랩 연구소장(공학박사/기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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