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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기 역사와 드론의 정의- 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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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대문소방서 허창식 | 기사입력 2023/03/20 [10:00]

항공기 역사와 드론의 정의- Ⅳ

서울 서대문소방서 허창식 | 입력 : 2023/03/20 [10:00]

<2022년 12월호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4. 항공기의 역사(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 아시아 태평양 전쟁)

독일이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프랑스, 영국 등까지 전쟁을 확장하면서 의도한 대로 많은 성과가 있었지만 그만큼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전쟁이 길어지고 전투 범위와 규모가 점차 확대될수록 군자 물자(에너지, 식량) 수량 확보와 공급에 어려움이 있었다.

 

결국 멈출 수 없는 전쟁을 유지하기 위해 소련과의 불가침 조약(1939년 8월 23일)까지 파기하면서 기습을 감행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주축국 중 군수 물자 확보와 공급에 어려움이 있었던 건 독일뿐만이 아니다. 당시 유럽 반대편의 아시아에 있는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18세기부터 서양의 열강들은 산업혁명(원료공급, 상품시장 개척, 자본투자)을 위해 침략을 통한 식민지 건설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이때 청나라는 아편전쟁(1840년)에 패배하면서 1842년 난징조약을 체결해 영국에 문호를 개방했다.

 

일본 또한 미국에 굴복해 가나가와 조약과 미일 수호 통상조약(관세 자주권, 치외법권)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결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네덜란드와도 통상조약을 맺으며 서구 열강들의 무역 시장으로 전락했다. 일본은 막부의 권위 쇠퇴는 물론이고 서양 상품 범람으로 매우 큰 경제적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치명적인 경제적 위기로 하급 무사들의 외세 배격 운동이 확대됐다.

 

결국 1868년 사쓰마와 조슈번에 의해 천왕 중심의 근대적 국가를 향한 메이지 유신이 탄생하게 된다. 메이지 유신 정부는 적극적인 서양의 선진 문물 도입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게 메이지 유신 정부 3년 만인 1871년 관료 46, 수행원 18, 유학생 43명으로 구성해 미국ㆍ유럽 각지에 파견한 이와쿠라 사절단이다.

 

이는 당시 다른 나라와 관계를 맺지 않고 문호를 굳게 닫았던 조선 흥선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정책과 비교된다. 일본은 서구 열강처럼 세계적인 열강이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세계적인 열강을 꿈꾸던 일본은 1870년 이후 경제적 자급과 군사적 안보가 급격히 팽창하며 아시아 지배에 대한 욕심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청일전쟁(1894)과 러일전쟁(1904)까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승리를 거두며 아시아의 독보적인 강자로 승승장구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고 서구 열강들과 대등한 대우를 받기 위해 더욱 강력한 군사력을 갖길 원했다. 그러기 위해선 철강, 석유 등 천연자원이 꼭 필요했다. 

 

일본은 열강이 되기 위한 군국주의 광기 속에 무력을 행사하며 아시아 주변국을 무참히 침략하기 시작했다. 1931년에는 철과 석탄이 풍부한 만주를 침략하며 본격적인 천연자원 확보를 위한 식민지 건설에 나섰다.

 

일본의 무차별적 확장에 위기감을 느낀 서방 국가들은 1932년 ‘국제연맹 이사회’에서 영국과 미국 등 여러 나라가 중국을 도와 일본의 확장을 막기로 동의한다.

 

하지만 일본은 서방 국가들의 요구를 무시하며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다. 전쟁이 예상외로 장기화되자 군수 물자인 석유 확보를 위해 인도차이나반도와 인도네시아까지 눈독을 들인다.

 

당시 서방도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혼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상황이었다. 일본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독일, 이탈리아와 삼국 동맹을 맺은 후 지금의 베트남 지역인 인도차이나반도를 침략한다.

 

Nakajima Ki-27(1937)

일본 육군이 최초로 채택한 저익단엽 전투기로 1938년 중일전쟁에 투입돼 큰 활약을 했다. 공식명칭은 육군 97식 전투기로 연합국 코드명은 Nate다. 제2차 세계대전 개전 초까지 사용했으며 이후 차기전투기인 Ki-43 Hayabusa로 대체됐다(출처 bemil.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1/18/2015111803040.html).

 

이런 일본의 급격한 팽창을 가만히 볼 수 없었던 미국은 석유를 포함한 모든 군사 물자가 일본에 수출되는 걸 차단한다. 또 일본이 지금까지 점령한 모든 영토를 포기해야 수출금지 조치를 풀겠다고 강력하게 경고한다.

 

미국에서 80% 이상의 석유를 공급받던 일본은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본이 순순히 포기할 줄 알았던 미국의 예상과는 다르게 오히려 인도네시아 유전 확보를 계획함으로써 반전을 기회로 삼는다. 

 

하지만 일본은 인도네시아 유전을 확보하기 위해선 미국의 전략적 요충지인 하와이 진주만에 주둔하는 태평양 함대가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미국과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를 맺기 위해 1941년 12월 7일 항공모함 6, 전함 2, 전투함 15척, 항공기 350여 대로 진주만의 태평양 함대를 기습 공격한다. 

 

Mitsubishi A6M(1939)

Mitsibishi A6M의 제식명은 해군의 영식함상전투기(零式艦上戰鬪機)다. 조종사들은 보통 제로전투기(zero fighter) 레이센(Rei-sen)으로 불렀다. 우리에겐 진주만 공습과 가미카제 자살 특공대가 사용한 비행기인 제로센이란 용어로 알려져 있다. A6M은 당시 뛰어난 전투기로 불렸던 독일 Bf109와 영국 spitfire의 수준을 뛰어넘기 위해 만든 전투기다. 1939년 후반부터 일본에서 주력으로 사용했다. 비행성은 개발 당시 미국의 F2A, P40를 압도했으며 특히 선회력이 우수했다. 이는 1대1 도그파이팅이 잦은 공중전에서 우세를 점할 수 있었던 요인이 된다. 하지만 고성능을 달성하기 위해 무게를 무리하게 경량화하고 많은 부분은 생략한 채 개발돼 작은 적탄으로도 쉽게 파괴되는 내구성은 약점으로 꼽힌다. 게다가 성능을 개선하거나 향상하기 어려워 미드웨이 해전 이후 6개월 만에 미국의 신형 전투기인 F4U, P51 등에 고전하며 이후 서서히 쇠퇴했다(출처 bemil.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1/18/2015111803040.html).

 

일본의 기습 공습으로 미군은 상당한 피해를 본다. 하지만 일본이 계획한 전략은 예상을 철저히 빗나갔다. 제대로 된 선전포고도 하지 않은 기습 공격을 강행한 일본의 행동은 오히려 미국을 정치적으로 단결시키고 소수였던 참전 여론을 대다수로 만들 만큼 분노케 한 사건이 된다.

 

진주만을 기습 공습당하고 4개월 뒤 1942년 4월 18일, 미국은 보복 작전의 목적으로 둘리틀(Doolittle) 소령 작전 지휘 아래 일본 본토인 도쿄를 폭격하는 둘리틀 공습을 계획한다.

 

항공모함이 미국 본토에서 태평양을 건너 일본 본토까지 최대한 접근하는 데 위험이 따랐지만 마침 기존 함재기보다 항속거리(약 2174㎞)가 뛰어난 미 육군 항공대의 쌍발 중 폭격기인 B-25 Mitchell이 있어 해볼 만한 작전이었다.

 

그리고 당시 일본은 미국이 쌍발 폭격기를 운용하는 걸 전혀 알지 못해 설령 폭격이 실패한다 해도 이함거리를 최대한 멀리해(1200㎞) 이미 퇴각하는 항공모함을 비롯한 함대의 피해는 막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둘리틀 공습 당일 일본은 B-25의 접근을 알아차리지만 폭격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쌍발기를 PBY 카탈리나 정찰 수상기로 오인해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둘리틀 기습 공습은 일단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도쿄와 가와사키, 요코스카시, 나고야 등 상공에서 폭격 후 중국에 재보급할 예정이던 B-25 대부분이 중국 본토나 영해에 불시착했다. B-25 16기 모두 손실되고 80명 중 69명 만이 생환한다(4명은 전사, 7명은 포로).

 

애초 큰 피해보다는 미군의 사기와 일본 또한 본토가 안전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심리적 압박이 목표였기 때문에 성과를 이뤘다고 볼 수 있다.

 

North American B-25 Mitchell(1940)

B-25 Mitchell은 6인승 중폭격기로 미 육군 항공장교 빌리 미첼(Billy Mitchell) 준장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유일한 미군 항공기다. B-25는 원래 중고도 폭격기로 개발됐으나 저고도에서도 기총소사, 폭탄 투하를 이용해 큰 전과를 올린 전적이 있어 이후 다양한 기총 또는 포신을 설치해 활용했다. 그러나 둘리틀 공습에서는 항공모함에서 이함하려면 기체 무게를 줄여야 했기 때문에 B-25의 전면 기관총을 제외한 모든 기관총과 무전기를 빼버렸다. 또 어차피 돌아올 수 있는 작전 반경이 아녀서 고급 기술의 노출을 막고자 당시 최신 장비는 일반 장비로 교체 후 투입했다(출처 namu.wiki/w/B-25).

 

▲ 일본의 태평양 미드웨이 공격 계획(출처 blog.naver.com/domestic0821/221787053126)

 

일본군은 본토 공습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처음 당해보는 본토 기습 공습이었기 때문에 더욱더 태평양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려는 계획에 집착하게 된다. 그 계획은 미군기지가 있는 미드웨이를 먼저 1차로 점령하고 2차로는 하와이에 있는 미군 함대를 유도해 격파하는 거였다.

 

1942년 6월 4일 일본은 미드웨이 공습을 시도하지만 그 계획은 수포가 된다. 미군은 이미 일본군의 통신을 감청해 진주만 다음 2차 공격지가 미드웨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전투기와 장비들을 철수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매복을 준비한 상태라 일본군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일본이 미드웨이섬(육상)을 공격하려는 초기 계획은 미 해군 항공모함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급히 변경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함재기의 무기를 함선 폭격용으로 교체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을 소비할 수밖에 없었다.

 

공방전 끝에 일본이 미국(항모 2척)보다 전력(항모 4척)으로 우세했는데도 미 해군 폭격기 돈틀리스(Dauntless)에 의해 일본의 항공모함 4척이 모두 침몰하며 태평양에서 주도권을 미국에 완전히 빼앗기게 된다. 

 

 

Douglas SBD Dauntless(1940)

돈틀리스(Dauntless)는 독일 Ju-87의 영향을 받아 개발한 급강하 폭격기(뇌격기)다. 속도는 느리지만 12G에 달하는 중력에도 버틸 수 있는 튼튼한 설계로 내구성이 좋고 항공 거리가 길어 태평양 전쟁 내내 사용됐다. 돈틀리스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의 정예 항공모함 3척을 침몰시켜버리는 폭격기로 태평양 전쟁에 판도를 바꾸는 활약을 했다(출처 namu.wiki).

Consolidated PBY Catalina(1936)

미 해군에서 운영한 쌍발 정찰 비행정으로 역사상 가장 많이 생산(3305대)됐다. 느리고 비행 스펙은 그리 좋지 않으나 소형으로 튼튼하고 항속거리가 길어 정찰 임무에 진가를 발휘해 제2차 세계대전에 사용된 비행정 중에선 가장 많이 활약했다. 현재는 무장을 제거한 채 민수용으로 사용하고 있다(출처 namu.wiki).

Brewster F2A Buffalo(1938)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엔 유럽 전선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태평양 전선에서는 일본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결국 미군 함재 전투기는 대부분 F4F Wildcat으로 교체됐다. F2A Buffalo는 보조 전투기 또는 훈련기로 사용했으나 미드웨이 해전에서 제로센에 일방적으로 밀리면서 퇴역했다(단종)(출처 namu.wiki).

Grumman F4F Wildcat(1940)

미 해군ㆍ미 해병대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사용한 함선 전투기다. F4F Wildcat은 기동성에서는 제로센에 열세였지만 방탄 캐노피, 좌석 후방 장갑, 고탄성 고무 연료탱크 등 당시 말도 안 되는 내구성과 뛰어난 화력(12.7㎜ 기관총)을 바탕으로 제로센과 대등 이상의 활약을 펼쳤다(출처 ko.wikipedia.org/wiki).

 

태평양의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은 미군은 동부 솔로몬 해전(1942년 8월 24~25일)에 이어 F6F 헬캣이 맹활약한 필리핀해 해전(1944년 6월 19 ~21일), 레이더만 전투(1944년 10월 23~26일)까지 일본 해군을 압승한다. 그리고 기세를 살려 오키나와를 발판으로 일본 본토까지의 진격을 계획한다.

 

이에 일본군은 미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남은 야마토함 9척과 전투함으로 마지막 대규모 작전인 천호 작전을 세우며 가미카제 형식의 자살 임무를 계획한다. 일본군의 가미카제 자살 공격은 미군의 메릴랜드 함과 베넷 함에 상당한 피해를 줬다. 하지만 시간을 지연시킬 뿐 당시 전 세계 무기의 2/3를 생산하는 미국 군수 산업의 힘 앞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일본은 포기하지 않고 격렬히 저항한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의 자살 공격 전술에 의한 방어 의지를 느낀 미군은 협상이 어려우리라 판단했다. 결국 1945년 8월 6일(히로시마)과 9일(나가사키) 원자폭탄을 투하함으로써 일본의 항복을 받아낸다.

 

Grumman F6F Hellcat(1941)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의 미 해군의 주력 함재기로 F4F Wildcat을 대체하고 일본의 제로센을 주 타깃으로 제작됐다. 기동성이 좋은 제로센보다 압도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18개의 실린더로 구성된 강력한 2천 마력 엔진인 Pratt & Whitney R-2800 Double Wasp를 사용했다(출처 www.historyonthenet.com/f6f-hellcat).

Vought F4U Corsair(1942)

제2차 세계대전에서 11:1의 격추비를 기록한 가장 강력한 항공모함 기반 전폭기로 한국전쟁까지 활약했다. F6F Hellcat과 마찬가지로 Pratt & Whitney R-2800 Double Wasp 엔진을 사용했으나 낮은 최대이륙중량과 뛰어난 공기역학적 설계로 공중을 장악할 수 있었다(출처 www.behance.net/gallery/137477637/The-Vought-F4U-Corsair).

 

서울 서대문소방서_ 허창식 hcs119@seoul.go.kr

 

<본 내용은 소방 조직의 소통과 발전을 위해 베테랑 소방관 등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 2019년 5월 창간한 신개념 소방전문 월간 매거진 ‘119플러스’ 2023년 3월 호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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