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취재] 전기실 스프링클러 허용 두고 논란 확산… 소방청 “재검토할 것”전기계 전문가들 “안전성 관련 건축 기준 정면 배치, 책임 분쟁도 불가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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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달 8일 소방청이 입법 예고한 '소방시설설치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안에는 물분무등소화설비 설치 대상물에 스프링클러설비를 설치한 경우 면제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 최영 기자 |
[FPN 최영 기자] = 소방청이 물분무등소화설비 대신 스프링클러설비를 전기실 등에 설치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령 개정을 추진하자 전기ㆍ소방계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경제성에 치우친 개정안이 전기설비의 안전성을 해치고 소방활동 중 인명피해까지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소방청은 지난달 8일 ‘소방시설설치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이하 소방시설법) 시행령’ 일부개정령안을 입법 예고하고 이달 19일까지 의견을 수렴 중이다.
이 개정안에는 물분무등소화설비를 설치해야 하는 대상물에 스프링클러설비를 설치한 경우 면제할 수 있는 근거를 담고 있다.
현행 ‘소방시설법’에선 물분무등소화설비를 의무적으로 갖춰야 하는 대상물을 별도로 규정하고 있다. 대표적인 대상 중 하나가 바닥면적 300㎡ 이상 전기실ㆍ발전실ㆍ변전실ㆍ축전지실ㆍ통신기기실 또는 전산실 등이다. 지금까지 대다수 전기실 등에는 물분무등소화설비 중 하나로 분류되는 가스소화설비가 적용되고 있다.
소방관련법상 물분무등소화설비는 ▲물분무소화설비 ▲미분무소화설비 ▲포소화설비 ▲이산화탄소소화설비 ▲할론소화설비 ▲할로겐화합물 및 불활성기체 소화설비 ▲분말소화설비 ▲강화액소화설비 ▲고체에어로졸소화설비 등 9가지로 나뉜다. 하지만 수계 소화제 방수로 인한 전기설비 등의 2차 피해 방지를 위해 소화약제 방출 시 피해가 없도록 가스계 소화 약제를 채택하는 게 통상적이다.
법령 개정안에 따라 전기실 등에 스프링클러설비 설치가 전면 허용될 경우 실제 이를 채택하는 현장은 급격히 늘어날 거라는 관측이 많다. 안전성보단 경제성을 우선하는 국내 건설 산업 특성을 고려할 때 법규 충족 여부만을 고려해 최대한 비용을 줄이려는 움직임이 많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기설비 분야는 물론 소방 분야 전문가들조차 무차별적인 스프링클러설비 적용으로 나타날 수 있는 악영향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
“수손 피해 우려 심각, 건축 전기기준과도 정면 배치”
해당 개정안을 두고 전기설비 분야의 관계자들이 꼽는 가장 큰 문제는 전기설비에 관한 건축 관련 규정과 정면 배치된다는 점이다.
국토교통부가 규정한 건축물의 ‘전기설비 관련 시설공간’ 설계기준(KDS 32 10 11: 2024)에는 전기설비 시설 공간(실)의 안전성 조항을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스프링클러설비를 적용할 경우 이를 어길 수밖에 없다는 게 전기 관계자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이 기준에선 ‘전기설비의 설치장소는 물이 침입하거나 침투할 우려가 없는 건조한 장소여야 하며 고온 다습한 경우를 대비해 환기장치를 설치하는 등 적절한 방호조치를 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또 ‘전기실 및 발전설비실은 지하 저수조 기계실 등 물 사용 공간과 완전히 구획돼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 ▲ 전기 기술계 관계자들이 제시하는 전기설비 관련 시설 공간 설계 기준 © FPN |
전기 기술계에 따르면 이 규정은 전기설비를 갖출 때 지켜야 할 필수적인 안전 조치다. 스프링클러설비를 설치할 경우 이를 어기는 꼴이 된다는 설명이다.
신효섭 건축설비기술사(서울시 안전관리자문단 위원)는 “전기설비 설치장소에 스프링클러설비를 설치하면 국한된 공간의 불은 끌 수는 있겠지만 쇼트가 생겨 시설이 차단되거나 수손 피해로 이어져 건축물의 전체적인 전기적 피해를 불러올 수 있다”며 “건축 안전성 기준에선 물 사용 공간과 완전히 구획되도록 하고 침수 방지를 위해 최하층에는 설치하지도 못하게 할 만큼 강한 수손 피해 방지책을 규정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스프링클러로 인한 피해 발생 시 복구를 위해서는 최소한 일주일에서 수십 일이 걸릴 수 있는데 규모나 중요도가 큰 빌딩이나 시설물의 경제적 피해는 더 클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세밀한 검토 없이 전면 허용되는 스프링클러설비 기준이 세계적 표준과 맞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글로벌 기준인 NFPA 70 코드에서는 전기설비와 무관한 배관이나 덕트, 누수방지 등 다른 설비의 설치를 제한하고 있고 스프링클러설비 설치 시에는 누수와 결로, 파손 등으로 인해 전기설비에 손상을 주지 않도록 보호 조치를 필수사항으로 요구한다는 게 전기 기술계의 설명이다.
전기 공간 내 스프링클러 설치를 허용하고는 있지만 전기설비 손상이 발생하지 않도록 세밀한 보호 조건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신효섭 기술사는 “사실 근본적으로 전기시설에 물을 뿌리겠다는 건 멱살을 잡힐 일”이라면서 “만약 전기실 등에 스프링클러 등을 설치할 경우에는 방수 등급의 전기 자재를 쓰도록 하는 등 제약 조건들이 필수로 마련돼야 한다”고 했다.
“소화 성능만 볼 일 아냐, 책임 소재 분쟁 불가피”
전체적인 건축 전기설비의 구조 특성과 건축 시장의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법규 개정은 치명적인 문제를 불러올 수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전기 기술계에 따르면 발전기실의 경우 비상전원이 각종 건축 전기시설에 투입되는 과정에서 복잡한 프로세스를 거치게 된다. 방재센터나 전산센터, 통신실 등 중요도에 따라 순차적인 전원 공급을 위한 고가의 제어설비도 반드시 필요하다. 문제는 자동화가 심화하는 최근의 건축전기시설은 자동제어 시설이 복잡하게 구성돼 수손 피해 발생 시 물적 피해는 더 클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 ▲ 물분무등 소화설비를 갖춰야 하는 전기실 ©최영 기자 |
한남현 한국기술사회 건축전기설비기술분회 회장은 “오작동에 따른 수손 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 만약 화재 시 불은 끈다 해도 결과적으로 건축물 전기설비 전체가 정지되는 영향을 불러오게 된다”며 “만약 수천억원씩 들어가는 전산센터일 경우 빈대를 잡기 위해 초가삼간을 태울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스프링클러설비 설치 허용 시 소화설비 종류의 선택권이 확대돼 사용자가 특성을 고려하면 된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서도 강하게 반박했다.
한남현 회장은 “소화설비의 특성을 전기 기술자와 건축주가 자발적으로 고려해 선택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직업윤리가 작동하지 못하는 건설 현장을 모르고 하는 얘기”라며 “돈의 힘, 즉 건물주의 힘만 작동하는 건설 현장은 자체 정화가 이뤄질 수 없는 게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건축물은 지은 뒤 건축주 자신이 직접 사용하거나 임대나 분양을 통해 수익을 내는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며 “우리나라 건물 100개 중 95개는 임대 또는 분양 건물인데 최대한 경제적인 건물을 지어 높은 수익을 내고 털어내려는 건축주를 엔지니어적 직업윤리로 설득하는 건 불가능하고 건축주 입장에선 말 안 듣는 설계사를 바꾸면 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한 회장은 “전기설비 등의 보호 조치 없이 스프링클러설비가 설치될 경우 이를 선택하는 건물이 무분별하게 늘어나고 건축물을 인수한 소유주나 사용자들은 결국 그 피해를 떠안아야 하는 불합리한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사고 시에는 전기와 통신, 소방 등 분야 내 갈등과 함께 공정 단계별 책임 분쟁도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소방 전문가도 “제약 없는 허용은 인명 피해 우려 키워”
소방 분야 내에서는 건축물 관계인과 소방대의 현장 대응 활동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피해에 대해 크게 우려하고 있다. 제약 없이 스프링클러설비를 무턱대고 갖추도록 했다간 되레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김상일 소방기술사는 “전기실에서 스프링클러의 물이 쏟아지면 메인 차단기가 다운되지 않아 누전이 발생하게 되고 이는 소방관의 진압 활동 과정에서 감전 사고와 같은 인명피해를 불러올 수 밖에 없다”며 “미국은 전기 판넬 1.8m 내 스프링클러 설치를 금지하고 전력의 셧다운이 보장되도록 하거나 인명 접근 금지 등 다양한 안전 제한을 두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 기술사는 스프링클러설비 작동에 따른 소방시설의 영향에 대해서도 염려했다. 그는 “발전기실 같은 경우 스프링클러 작동으로 인해 소방부하 담당 비상전원이나 상용전원 등이 모두 다운될 수 있다”며 “비상발전에 영향이 생긴다면 소화수로 인해 제연설비 등 다양한 소방시설의 정지 사태까지 불러올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꼬집었다.
소방청 “반대 의견 많아, 면밀한 검토 진행 예정”
해당 법령 개정안을 입법 예고한 소방청은 반대 의견이 쏟아지자 법령 개정에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소방청 분석제도과 관계자에 따르면 입법 예고 이후 상당량의 반대 의견이 접수된 상태다. 이에 따라 실제 법령 개정 여부는 추가적인 전문가 검토를 거쳐 최종 결정하겠다는 방침이다.
소방청 관계자는 “그간 중앙기술심의위원회에도 검토가 요청된 적이 있었고 연구용역 또한 진행된 부분이어서 개정안을 마련하게 됐다”면서 “전문가 의견을 종합해 보완을 거쳐 재진행하거나 전면 재검토를 진행해야 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향후 소방시설 관련 업계와 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관련 회의를 개최할 계획이다”고 덧붙였다.
물분무등소화설비 설치대상에 스프링클러설비를 설치할 경우 면제 근거를 마련하는 내용의 ‘소방시설법 시행령’ 개정안은 지난 2023년 12월 완료된 소방청의 연구용역 결과물이라는 게 소방청 설명이다.
‘성능과 기능이 유사한 소방시설 면제기준 적정성 등에 관한 연구’라는 주제로 진행된 이 용역은 2023년 5월 19일부터 12월 14일까지 약 7개월간 한국화재소방학회가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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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과업은 특정소방대상물의 소방시설 설치면제 기준 분석과 배터리 관련 시설의 소화설비 효과성 분석 등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 추진됐다. 이 연구결과를 토대로 배터리 관련 제도 개선안과 다양한 소방시설의 설치 면제기준 개선안이 소방청에 제시됐다.
하지만 <FPN/소방방재신문> 취재결과 연구보고서엔 전기설비와의 기준 충돌 문제, 스프링클러설비 설치 시 전기설비의 안전성 확보 대책, 소방활동 시 인명안전에 관한 세부 검토 내용 등은 일체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최영 기자 young@fpn119.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