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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짧았던 올해의 국정감사.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인사혁신처 등 굵직한 대상기관이 세 곳이나 묶인 탓이다. 하지만 짧은 시간에도 국회의원들의 질의는 차가웠고 소방의 현실은 뜨거웠다.
감사 결과를 세 단어로 압축한다면 신뢰의 붕괴와 구조적 빈틈, 그리고 국가 책임의 부재가 아닐까 싶다.
각종 제도는 존재했지만 현장에선 작동하지 않고 의무는 많지만 권한이나 책임 주체가 부실한 게 문제다.국민은 최후의 방패가 제 역할을 하길 기대할 텐데 그 피해가 고스란히 소방현장을 넘어 국민에게 돌아가는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소방공무원의 외상 후 스트레스에 따른 ‘PTSD 공상’ 불승인율이 24.4%에 달한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충격적이다. 재난현장에 뛰어든 이들에게 국가는 ‘증거를 가져오라’고 말한다. 구조현장에서 흩어진 기억을 증거로 요구하는 건 잔인하기까지 하다.
소방공무원 상담 인력 1명이 630명의 소방관을 관리하는 현실 역시 절망적이다. 숫자만 놓고 보면 관련 제도는 존재하지만 실상은 ‘형식’에 불과하다. 현장에선 아직도 수많은 소방관이 외상 후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침묵 속에서 무너지고 있다. ‘반증이 없으면 인정한다’는 더 확고한 원칙이 필요하다.
나아가 퇴직 후에도 지원받을 수 있는 전 생애주기 심리관리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상담 인력의 정규직 전환과 지역별 전담 조직도 고민할 부분이다. ‘국가가 입증해야 할 의무’를 외면하면 소방은 결국 버텨야 하는 직업이 될 수밖에 없다.
‘예방 행정의 신뢰’도 되찾아야 한다. 부산 반얀트리 리조트 화재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느슨한 안전 관행 속에 살아왔는지를 드러냈다. 방화문도, 스프링클러도, 감지기도 완비되지 않은 건물에 완공 승인이 떨어졌다. 현장 확인은 원칙이 아니라 선택으로 전락했고 감리자는 건축주의 눈치를 본다. 안전이 거래의 대상이 되고 있는 셈이다.
이런 구조를 방치한다면 어떤 법도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 현장 확인을 원칙으로 제도적 보완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감리자의 계약 독립성도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자체점검비 또한 현실에 맞게 조정해야 한다. 불합리한 기준을 지키라거나 소방이 만든 기준을 스스로 준수하지 않는 건 탁상행정의 전형이다.
대전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는 국가 시설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여줬다. 리튬이온 배터리는 한 번 폭주하면 진압이 어렵다. 그런데도 데이터센터 속에는 배터리와 전산시설이 함께 있는 곳이 즐비하다.
도면은 ‘보안’을 이유로 감춰지고 위험 정보는 소방에 전달조차 되지 않는다. 국가보안시설이라는 이유로 숨겨진 정보는 결국 위험을 가져왔다. 리튬배터리를 확실하게 분리해야 하는 기본이 무너져 내렸다. 데이터센터를 ‘특별관리시설’로 지정하는 데 더해 소방법을 넘어선 안전관리가 필요하다.
국정감사에선 일회용 멸균 구급기기의 재사용 문제도 도마에 올랐다.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재사용을 묵인한다면 규범은 무너진다. 17개 시도의 구급장비 사용량과 예산을 전수조사해 합리적 기준을 세워야 한다. 금지 원칙을 예산으로 뒷받침하지 않는다면 현장은 계속해서 불법과 타협할 수밖에 없다.
피복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소방관 10명 중 8명 이상이 현행 기동복에 불만을 갖고 있다. 땀을 흡수하지 못하는 옷은 단순한 불편이 아니라 안전의 문제다. 지역별 복제 예산 편차가 25만원에서 70만원까지 벌어지는 현실은 국가직 전환에도 지역별 복지 편차를 보이는 소방 현실의 단상이다.
지휘 체계의 경직성도 빼놓을 수 없는 문제다. 소방정 계급이 장기간 고착되면서 조직은 굳어가고 있다. 중간 직위가 부재한 자리에는 책임의 공백만 남았다. 중간직 신설이 반드시 필요하다.
소방관의 평균 수명이 일반 공무원보다 5년 짧다는 사실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조기 퇴직자에게 연금 불이익을 주는 시대착오적 현실은 오래 버틴 사람만이 보상을 받는 제도가 돼 버렸다. 일찍 무너지는 이들을 보호하는 체계가 있어야 진정한 복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국정감사는 비판의 장이 아니라 점검의 장이다. 그러나 점검만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오늘의 지적이 내일의 정책이 되고 모레의 실질적 변화로 이어질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소방의 기준은 단순해야 한다. 현장에 도움이 되는지, 시간을 줄이는지, 생명을 지키는지. 이 세 가지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 수 있다면 올바른 방향이다.
소방은 최전선에서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있다. 그들이 흔들리지 않도록 뒷받침하는 건 국가의 의무다. 이제 필요한 건 새로운 약속이 아니라 실천이다.
약속을 제도로, 제도를 실행으로, 실행을 성과로 연결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국민이 믿는 소방’이 완성될 수 있다. 국회도 소방의 현실을 감사장에서만 외쳐선 안 된다.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을 이어가길 바란다.
<본 내용은 소방 조직의 소통과 발전을 위해 베테랑 소방관 등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 2019년 5월 창간한 신개념 소방전문 월간 매거진 ‘119플러스’ 2025년 11월 호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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