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1일부터 열흘간 산청과 하동, 의성, 안동, 청송, 영양, 영덕, 울주 등 영남권 8개 시군에서 동시다발적 산불이 발생했다. 피해 면적은 총 10만4천㏊, 축구장 약 14만5600개에 달하는 크기다. 관련 통계 작성이 시작된 1987년 이후 최대 규모의 피해 면적으로 기록됐다.
31명이 숨지고 52명이 다치는 유례없는 인명피해도 발생해 전 국민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줬다. 재산피해액은 1조818억원에 달한다. 3848개 주택과 7115개 사유시설, 5643개 국가유산 등 공공시설이 화마의 포효 앞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산불 포비아’에 빠진 대한민국, 예방ㆍ대응체계 개선 논의 급물살
사상 최악의 산불을 겪은 우리 사회는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된다’는 위기의식에 봉착했다. 산불 예방ㆍ대응체계의 개선 필요성과 시급성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
국회는 산불피해지원대책특별위원회(이하 산불특위)를 발족하고 지난 6월 10일 열린 전체회의에서 행정안전부(이하 행안부)와 소방청, 산림청 등 정부 부처를 향해 날 선 질책을 쏟아냈다. 특히 효율적 산불 대응을 위해 지휘체계를 개편해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쳤다.
국회입법조사처가 13명의 분야별 입법조사관으로 조직한 산불대응연구TF는 지난 6월 27일 대형 산불에 대한 국가적 대응 과제를 주제로 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 보고서엔 산불 대비 체계를 예방ㆍ대응ㆍ복구 등 세 단계로 나누고 각 단계의 주관기관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예방은 산림청, 대응은 소방청(진화)과 지자체(주민 대피), 복구는 산림청(산림)과 행안부ㆍ지자체(이재민 구호)가 맡는 개선안을 제안했다.
관련 논의의 장도 잇달아 마련됐다. 대표적으로 ▲경북소방학교가 주최한 ‘초대형 산불과 소방 대응 학술세미나’(6월 12일) ▲양부남ㆍ김상욱ㆍ박정현ㆍ이광희ㆍ채현일ㆍ차규근 의원이 공동 주최한 ‘산불재난 제도 개선 방안 정책 토론회’(7월 1일) ▲민홍철ㆍ김정호 의원이 공동 주최한 ‘대형 산불재해 예방ㆍ진화ㆍ복구 원스톱 시스템 구축 방안 토론회’(7월 31일) ▲산불특위가 주최하고 농림축산식품부가 주관한 ‘산림경영 논쟁 토론회’(8월 5일) ▲신정훈 의원이 주최하고 대한민국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 소방공무원노동조합이 주관한 ‘산불과 소방 토론회’(9월 16일) ▲차규근 의원이 주재한 ‘드론을 이용한 산불 진화 현황ㆍ과제 정책 간담회’(9월 27일) 등이 진행되면서 산불에 대한 높은 관심을 실감케 했다.
뜨거운 감자 된 ‘갈팡질팡 산불 지휘체계’… “소방이 맡아야”
지속된 논의 과정에서 산불 대응 인력과 장비, 임도, 내화수림 등이 쟁점으로 떠올랐다. 가장 크게 부각된 문제는 단연 산불 대응 지휘체계상의 혼란이었다.
현행 법령상 산불 진화 주관기관은 산림청이다. 하지만 지휘권은 상황에 따라 이동한다. 산림 피해 면적이 100㏊ 이하일 땐 기초자치단체장 또는 산림청 소속 관할 국유림관리소장, 100㏊ 이상이면서 1천㏊ 미만일 땐 광역자치단체장, 1천㏊ 이상일 땐 산림청장이 지휘권을 갖는다. 소방청은 산불 진화 지원부처로서 산림 주변 가옥이나 시설물 방호를 담당한다.
건조한 날씨와 강풍으로 시도 경계 없이 빠르게 확산하는 산불의 특성을 고려할 때 ‘탁상공론’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건 기자만의 생각일까. 1분, 1초가 중요한 상황에서 이처럼 분산된 지휘체계가 대응에 큰 혼란을 불러오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변화무쌍한 현장에서 지휘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계산해야만 하는 상황 자체가 아이러니할 뿐이다.
요즘 산불은 ‘산’과 ‘도심’이라는 인간의 구분대로 구역을 나눠 발생하지 않는다. 산에서 시작된 불이 도심으로, 도심에서 시작된 불이 산으로 순식간에 옮겨 간다. 즉 불은 불이다. 산불의 무차별적 확산이 ‘뉴 노멀(New normal)’이 된 시대다. 산과 도심을 구분하고 서로 다른 기관의 소관으로만 여기는 인식은 ‘구태’라는 지적을 피할 길이 없다. 유기ㆍ복합적 대응만이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열쇠다.
산불 현장에선 순간적 판단과 실행이 대응의 성패를 좌우한다. 전문ㆍ일원화된 컨트롤 타워가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다. 산불 현장의 복잡한 지휘체계를 일원화하자는 논의 앞에서 정부 부처 간 알력을 살펴야 한다면 이보다 한심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그저 제일 잘할 수 있는 기관에 맡기는 건 상식이다.
누가 제일 잘할 수 있을까. 일사불란한 명령체계와 화재 현장 대응 경험, 실질적 장비ㆍ인력, 불에 대한 전문성 등을 모두 갖춘 조직은 대한민국에 한 곳뿐이다. 산불을 발견하면 어디에 신고하는가. 국민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
국회ㆍ정부 개선책 잇따르지만 알맹이는 바뀐 게 없어
산불 대응 업무를 소방청으로 이관해야 한다는 여론은 활발한 입법 활동으로도 표면화되고 있다. 조국혁신당 차규근 의원은 지난 8월 26일 ‘소방기본법’ㆍ‘산림재난방지법’ㆍ‘의용소방대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개정안, 일명 ‘산림화재 3법’을 대표 발의했다.
법안엔 소방이 적극적인 산불 진화에 나설 수 있도록 ‘산불 진압’을 ‘소방지원활동’에서 ‘소방활동’으로 명문화하고 산불 진화 주관기관을 산림청에서 소방청으로 변경하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같은 당 정춘생 의원은 지난 9월 18일 ‘산림화재 3법’에 더해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하며 지원 사격에 나섰다.
이 법안들을 묶어 정 의원이 명명한 약칭은 ‘산불대책 패키지 4법’이다. ‘산림화재 3법’과 같은 입법 취지ㆍ내용을 공유하면서도 산불진화헬기 동원 절차의 효율성을 높이는 내용이 포함됐다. 이 법안들은 현재까지도 법안심사 소위에 계류 중이다. 바뀐 게 없는 셈이다.
정부 차원 대책 또한 없진 않다. 그러나 실질적 개선을 이룰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행안부와 국방부, 농림축산식품부, 기후에너지환경부, 소방청, 산림청, 경찰청, 기상청 등은 ‘산불 종합대책’을 함께 수립하고 지난 10월 22일 공표했다.
여기엔 산불 예방ㆍ대응, 산림 관리 등에 관한 부처별 혁신 방안과 세부 추진 전략이 담겼다. 지원기관에 머무르던 소방에도 산불 초동 대응 역할을 부여한다는 내용이 포함됐지만 산림청이 산불 대응을 진두지휘하는 현 체제는 대체로 유지되는 모양새다.
재난성 대형 산불 우려 시 대응 단계와 상관없이 산림청장이 지휘권을 조기에 행사하는 방안도 담겼지만 과연 전문성 없는 컨트롤 타워가 산불이라는 재앙에 맞설 답이 될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이러한 범정부 대책을 바라보는 국민의 눈초리는 곱지 않다. 산불 앞에서 처참히 패배한 산림청을 향한 국민의 공분은 물론 국회와 여론까지 무시한 대책은 특정 정부 부처의 아집에 손을 들어준 꼴이라는 지적이 적지 않다.
결국 영남권 대형 산불로 촉발돼 2025년 한 해를 뜨겁게 달군 산불 대응체계 개선 논의는 요란한 빈 수레에 불과하고 말았다.
전 국민을 비탄에 빠트렸던 계절은 또다시 다가오고 있다. 과연 무엇이 변했는지는 모든 국민이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 할 일이다.
김태윤 기자 tyry9798@fpn119.co.kr <저작권자 ⓒ FPN(소방방재신문사ㆍ119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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