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광고

로프 하나로 세계와 맞닿다… ‘GRIMP TAIWAN’- Ⅱ

낯선 땅, 험한 길, 그리고 우리

광고
서울 노원소방서 박정수 | 기사입력 2026/02/02 [10:00]

로프 하나로 세계와 맞닿다… ‘GRIMP TAIWAN’- Ⅱ

낯선 땅, 험한 길, 그리고 우리

서울 노원소방서 박정수 | 입력 : 2026/02/02 [10:00]

습도 80%의 환영 인사… 전장은 시작됐다

대만 타이중 공항에 내리자마자 훅 끼쳐오는 습한 공기가 우릴 맞이했다. 10월이라지만 대만 날씨는 여전히 한여름 같았다.

 

곧바로 현지 통역사를 만나 차량부터 렌트했다. 챙겨 온 장비 양이 워낙 어마어마했기에 대형 SUV와 승합차 등 두 대를 빌려 겨우 짐을 실을 수 있었다. 운전하면서 바라본 대만의 풍경은 평화로웠다. 하지만 창밖 풍경과 달리 머릿속은 이미 전장이었다.

 

▲ 낯선 땅에서 먹는 맛있는 음식. 식도락 또한 국제대회 여정의 즐거운 일부분이 아닌가.

 

숙소로 이동하는 길, 잠시 짬을 내어 현지 음식을 맛보며 긴장을 풀었다. 어느덧 해가 저물고 숙소이자 대회 장소인 ‘쭈샨(Zhushan) 난터우(Nantou) 훈련센터’에 도착했다. 깜깜한 저녁이었지만 센터 안은 분주했다. 여러 나라에서 모인 각양각색의 유니폼이 눈에 들어왔다.

 

서로 사용하는 언어는 달랐지만 스쳐 지나가는 눈빛 속에서 묘한 동질감과 함께 팽팽한 긴장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폭풍 전야, 잠 못 이루는 밤

방을 배정받고 짐을 풀었지만 아무도 침대에 눕지 않았다. 내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닥쳐올 관문인 ‘PPE 장비 검사’에 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동 중 흐트러진 로프를 다시 사리고 하강기 작동 여부와 장비들의 정렬상태를 점검했다.

 

“달그락, 달그락”

 

▲ 늦은 저녁, 다음 날 대회를 위한 장비 점검

 

고요한 방 안에 금속 장비 부딪히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수십 번 확인한 장비지만 혹시라도 놓친 게 있을까 싶어 보고 또 봤다.

 

모든 점검을 마치고 불을 끈 시각은 자정을 훌쩍 넘겨서였다. 내일의 컨디션을 위해 억지로라도 자야 했다. 침대에 몸을 누였지만 몸은 피곤한데 정신은 말똥말똥했다. 에어컨 소리가 웅웅거리는 낯선 천장을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수없이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만약 가져온 로프가 부족하다면…’ 

‘팀 원 중 한 명이라도 다친다면…’

 

숙소는 고요했지만 우리 중 아무도 쉽사리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온갖 상상을 하며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과 싸우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이튿날 새벽,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창문을 여니 훈련센터 특유의 풀 냄새와 습한 공기가 훅 들어왔다. 이제 진짜 시작이다. 거울 속 내 눈을 한 번 쳐다보고 신발 끈을 고쳐 맨 뒤 비장한 표정으로 방문을 나섰다.

 

첫 번째 관문 PPE 장비 검사 “전쟁은 디테일에서 시작된다”

대회의 서막은 화려한 개회식이 아닌 살벌한 ‘PPE 검사’로 시작됐다. 국제 로프구조대회, 특히 GRIMP 시리즈에서 장비 규정은 타협이 없다. 유럽 표준(EN)과 NFPA(미국화재예방협회)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거나 마모가 심한 장비, 식별 표식이 지워진 로프는 가차 없이 퇴출당한다.

 

▲ PPE 검사

 

장비들은 우리 팀에게 배정된 스테이션에 하나하나 펼쳐 놨다. 검사관들은 로프 길이와 직경, 제조 연월은 물론 카라비너와 도르래의 아주 작은 흠집까지 확인했다. 점검 과정에서는 검사관들의 목소리가 긴장감을 더했다.

 

“It’s not labeled. Check it again

(이 장비는 마킹이 안 돼 있어요. 다시 확인하세요)”

“This has a sharp edge. Don’t use it

(이 장비는 날카로운 부분이 있어요. 사용하지 마세요)”

 

실제로 우리가 가져간 장비 중 하나인 하강기가 사용 불가 판정을 받았다. 단순 규정 때문이 아니다. 구조현장에서 장비의 결함은 곧 구조대원, 구조대상자의 생명과 직결된다. 

 

다행히 큰 지적 없이 대부분 통과했지만 이 점검은 그 자체로 이미 한 번의 ‘시험’이자 ‘우리는 안전에서 절대 타협하지 않는다’는 구조대의 기본 철학을 증명하는 시간이었다.

 

미션 브리핑 언어의 장벽을 넘어 해법을 찾아라

▲ 미션 브리핑 중

 

장비 검사가 끝나자 곧바로 정해진 일정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해결해야 할 미션은 총 열 가지. 첫째 날 1, 둘째 날 4, 셋째 날 5개가 배정됐다. 숨 돌릴 틈 없이 이어지는 일정 속에서 하루에 여러 미션을 연달아 수행해야 했다.

 

미션 하나를 완료하면 곧바로 모든 장비를 정비하고 다음 미션지로 이동해야 했다. 우리에게 쉴 틈이란 없었다. 매번 장비를 싣고 내리는 작업만으로도 체력은 급속히 소모됐다. 미션 간 거리가 상당해 차량으로 이동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10개의 미션을 관통하는 가장 큰 적은 두 가지였다. 바로 ‘언어의 장벽’과 ‘시나리오의 불확실성’이었다.

 

언어가 아닌 로프로 소통하라

미션에 대한 브리핑은 각국 여러 팀이 모여 영어와 중국어로 진행됐다. 현지 통역사를 고용했지만 어디까지나 언어 전문가일 뿐 일반인이다. 테크니컬 로프 구조현장에는 생소한 전문 용어가 난무한다.

 

구조현장에서 쓰이는 세세한 기술적 뉘앙스와 급박한 상황 변수까지 일반인이 완벽하게 통역해 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자칫 잘못 이해하면 미션 요구 조건을 착각하거나 시스템 설치가 엉뚱하게 될 수 있었다. 이는 곧 실격이나 시간 초과로 이어진다.

 

그래서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는’ 심정으로 묻고 또 물었다. 다른 팀들은 이미 장비를 챙겨 출발했지만 우리 팀은 여전히 브리핑 장소에 남아 재차 확인을 거쳐야 했다. 

 

출발이 지연되는 걸 보며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마음은 타들어 갔다. 하지만 방향을 모른 채 속도만 내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 고통을 즐기는 팀원들

 

그러나 확신이 서는 순간 상황은 역전됐다. 입으로 하는 언어는 더디고 서툴렀지만 ‘기술의 언어’는 만국 공통이었기 때문이다. 늦게 출발한 만큼 더 빠르고 정확하게 움직였다. 우리가 엣지에서 로프를 보호하는 모습, 설치한 앵커링, 매듭, 시스템의 정교한 각도, 백업 라인의 팽팽한 텐션.

 

이것들이야말로 우리가 심판들에게 건네는 가장 확실한 대화였다. 말이 통하지 않을 땐 완벽한 퍼포먼스가 곧 언어였다.

 

실패의 쓴맛… 다시 일어서다

순조롭기만 했던 건 아니다. 사흘간의 여정 중 가장 뼈아픈 기억은 ‘경사지 구조’ 미션이었다. 문제는 ‘경험치’였다. 한국에서의 훈련 중 경험해보지 못한 엄청난 길이의 경사지 구간이었다.

 

로프는 끝없이 늘어졌고 울퉁불퉁한 바위들의 마찰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챙겨온 로프는 짧기까지 했다. 서로의 외침이 허공으로 흩어지는 답답한 상황.

 

그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악재가 터졌다. 들것을 들고 경사지를 오르던 팀원 한 명이 미끄러져 들것에 깔리는 사고가 발생해 다리를 다쳤다. 절뚝이는 팀원을 보는 순간 리더인 나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냉철하게 판단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할 순간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 실제 부상 당시

 

‘포기해야 하나? 그대로 밀어붙여야 하나? 

다른 루트? 대안? 뭐가 정답이지…?’

 

머리가 텅 비었고 판단은 늦어졌다. 내가 부상 팀원과 역할을 바꿔가며 계속 임무를 이어갔지만 “Time Over” 심판의 냉정한 종료 선언이 떨어졌다. 우린 제한 시간 내 구조대상자를 완료 지점까지 올리지 못했다. 명백한 실패였다.

 

장비를 정리하는 팀 분위기는 순식간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다친 대원에 대한 걱정과 리더로서 구조 시스템을 제대로 설계하지 못했다는 자책감, 실패했다는 패배감이 우릴 짓눌렀다. 미션이 종료된 후 한동안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씁쓸한 침묵만이 우릴 감쌌다.

 

그 침묵을 깬 건 결국 서로를 향한 격려였다.

 

“형님, 괜찮아요. 아직 미션 남았잖아요”

“다리는 좀 어때? 할 수 있겠어? 그래, 다시 해보자!”

 

우린 실패를 곱씹으며 서로의 마음을 다잡았다. 뼈아픈 실수는 오히려 예방주사가 됐다. 독기가 생긴 우린 이후 남은 미션에서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했다. 더는 실수가 없었다. 남은 미션을 보란 듯이 순조롭게 클리어했다. 비 온 뒤 땅이 굳듯이 이 미션은 우릴 가장 뜨겁게 성장시켰다.

 

해가 저물고 다시 내일을 준비하며

매일 정해진 미션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정신은 어느 때보다 맑았다. 다른 국가 팀들의 창의적인 구조 방식을 보며 감탄했고 우리의 부족한 점을 뼈저리게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도 통한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도 몸은 식당에 있지만 마음은 이미 내일 미션으로 향해 있었다. 대만의 밤은 깊어만 가고 대한민국 구조대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내일은 더 빠르고, 더 안전하게!”

 

 

서울 노원소방서 박정수 wjdtn2234@naver.com

 

<본 내용은 소방 조직의 소통과 발전을 위해 베테랑 소방관 등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 2019년 5월 창간한 신개념 소방전문 월간 매거진 ‘119플러스’ 2026년 2월 호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119플러스 정기 구독 신청 바로가기

119플러스 네이버스토어 구독 신청 바로가기

로프 하나로 세계와 맞닿다… ‘GRIMP TAIWAN’ 관련기사목록
광고
[인터뷰]
[인터뷰] 염태영 의원 “단열재 불연등급화는 우리 가족이 잠드는 공간을 안전하게 만드는 일”
1/4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