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번이다.
출동복 대신 편한 옷을 입는다. 무전기는 꺼져 있고 벨 소리에 심장이 뛰지 않는다. 하지만 몸 어딘가에는 여전히 ‘현장’이 남아 있다. 불꽃 앞에서 마주친 사람의 얼굴, 차 안에 갇힌 아이의 울음, 피로 젖은 바닥 위에서 무언가를 놓아야 했던 순간들. 그 장면들은 타다 남은 냄새처럼 일상에 배어 있다.
현장에서는 정신이 없다. 판단은 1초를 다투고, 감정은 뒤로 미뤄야 한다. 하지만 퇴근 후 조용한 집에 들어서면 그제야 밀물처럼 밀려온다. 비번은 휴식이지만 동시에 복기다. 어떤 날은 쉴 수 있고, 어떤 날은 그 장면들 속에서 맴돈다.
나는 소방관이다.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 하기에 나는 그곳에 있었다. 누구도 겪지 않았으면 하는 장면들, 그러나 누군가는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하는 일. 그것이 나의 몫이다.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
가끔은 묻는다. 왜 이 일을 계속하는 걸까. 사명감일까, 책임감일까. 명확한 답은 없다. 다만 현장에는 나를 기다리는 이들이 있다. 그래서 나는 달려간다.
비번의 얼굴은 평범한 가장의 얼굴이다. 아이와 장난치고, 아내와 마트에 가고, 밀린 빨래를 개고, 소파에서 낮잠을 잔다. 하지만 이 얼굴은 종종 일그러진다.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아직도 현장에 머물러 있다. 아이의 말에 짜증을 내고 가족에게 이유 없는 무심함을 보일 때면 자괴감이 밀려온다.
왜 나는 가장 소중한 이들에게 가장 좋은 얼굴을 보여주지 못할까.
두 세계 사이에서
출동 벨이 울리면 가족과의 식사도, 자녀의 운동회도, 아내와의 약속도 미룬다. 가족은 늘 이해해준다. 하지만 그 이해는 때로 무겁다. 내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보다 그들의 배려가 더 크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한 번은 화재 진압 후에도 그을음 냄새가 가시질 않았다. 몇 번을 씻어도 피부 속까지 밴 듯했다. 그날 밤, 어린 아들이 내 옆에 누워 말했다.
“아빠 냄새, 좋아.”
눈물이 났다. 아이에게 그 냄새는 단지 ’아빠의 냄새’였고, 고통과 희생이 아닌 일상의 일부였다.
감정의 무게를 내려놓기 위해
동료들은 현장의 무게를 안다. 말하지 않아도, 설명하지 않아도 통한다. 하지만 가족에게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사고 현장의 참혹함, 구조하지 못한 이에 대한 죄책감, 그 복잡한 감정의 실타래를.
그래서 종종 침묵한다. 아내가 “오늘 어땠어?”라고 물으면 “그냥 평범했어”라고 답한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그 ’평범함’은 누군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날일 수 있다는 것을.
심리상담사가 소방서를 찾아온 날 ‘트라우마 관리’ 교육을 받았다. 상담사는 말했다.
“감정을 억누르기보다 인정하고 표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 말이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잊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받아들이고 흘려보내는 것이 회복이라는 걸 깨달았다.
회복의 의식
비번마다 다짐한다. 피로도, 감정도, 냄새도 털어내자.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현장에 돌아가고 온전한 나로 집에 돌아오자.
작은 의식을 만들었다. 퇴근 후 집에 들어가기 전 차 안에서 5분간 숨을 고른다. 그날의 일을 돌아보고 감사할 것을 하나씩 떠올린다. 살아 돌아온 것, 함께한 동료들, 기다려주는 가족.
출근 전 아이들 방을 들여다보고 아내에게 “다녀올게”라고 말한다. 그 순간 나는 소방관이기 이전에 남편이자 아버지다.
말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들이 있다. 동료와의 침묵, 가족과의 식사, 아이의 웃음. 그런 순간들이 나를 다시 사람으로 만든다.
비번, 그리고 소방관의 얼굴
누군가 “소방관의 얼굴은 어떤 모습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비번의 얼굴입니다”. 그 얼굴에는 무거운 밤도, 다시 살아낸 아침도 담겨 있다. 한 사람의 마음이 무너지지 않도록 그 곁을 지킨 이의 흔적이 있다. 그리고 다시 나아가기 위한 망설임과 다짐이 있다.
비번은 단지 휴식이 아니다. 소방관이 인간으로 회복하는 시간이며, 내일을 향해 조용히 걸음을 준비하는 순간이다.
계양소방서 작전119안전센터 소방위 김동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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