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화기로 배터리 화재 잡겠다는 서울시… 전문가들 “실효성 없어” 비판“전용 소화기 있어도 철제 케이스 둘러싸인 대용량 배터리 화재 막긴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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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PN 최누리 기자] = 서울시가 안전한 대중교통 환경 조성 방안으로 배터리가 장착된 버스 등에 D급 소화기 설치를 추진하면서 논란을 빚고 있다. D급 소화기의 배터리 화재에 대한 적응성이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섣부른 정책 추진으로 국민 혼란만 불러일으킨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시는 지난 8일 ‘서울시, 리튬배터리 장착 대중교통 관리 강화… 잇따른 화재 불안감 덜어준다’란 제목의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이 자료엔 서울시가 안전한 대중교통 환경 조성을 위해 리튬 배터리가 장착된 궤도 모터카 34대와 시내ㆍ마을버스 1700여 대에 D급 소화기를 설치하겠다는 방침이 담겼다.
문제는 배터리 화재대응을 위해 D급 소화기를 설치한다는 점이다. <FPN/소방방재신문> 취재 결과 서울시는 명확한 사전 검증이나 전문가 자문도 없이 배터리 화재 적응성이 확인되지 않은 D급 소화기 설치 방안을 추진한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시 관계자는 D급 소화기 설치 방안 마련 시 자료 조사나 서울소방재난본부 자문 등이 이뤄졌는지 묻는 기자 질문에 “따로 그런 건 없었다”며 “전기버스 화재가 지속해서 발생하면서 자체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건 D급 소화기라고 보고 설치를 추진한 것”이라고 답했다.
금속 화재는 알루미늄이나 마그네슘, 나트륨, 칼륨 등과 같은 가연성 금속이 연소하는 화재를 말한다. 보통 건조사나 팽창 질석 등을 활용한 질식소화로 대응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금속 화재를 위한 D급 소화기의 표준 기준조차 마련되지 않았다. 배터리 화재에 대한 적응성 역시 불분명한 상황이다.
게다가 내부에서 1천℃ 이상 열이 발생하면서 불꽃으로 인한 ‘열폭주 현상’이 일어나는 배터리 화재를 효과적으로 진압할 수 있는 소화약제나 진압 방식도 마땅찮은 실정이다.
미국방화협회 코드(NFPA 855)에서는 에너지저장장치(ESS) 화재를 냉각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매개체는 물이라는 결과를 제시한다. 전기차 대표 기업 테슬라가 발표한 ‘리튬이온 배터리 비상대응지침’ 또한 배터리 화재를 진압(관리)하는 선호 물질로 물을 꼽는다. 이 지침에서는 금속 화재 진압제의 경우 진압 효과 가능성이 크지 않아 적합하지 않다고 명시하고 있다. 섣부르게 배터리 화재 적응성을 판단하는 건 위험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조철희 국립소방연구원 소방경(화공학 박사)은 “지금까지 금속 화재를 진압할 수 있다는 D급 소화기의 경우 알칼리와 알칼리토금속, 전이ㆍ전이 후ㆍ합금금속 등 금속 종류별 화재 진압 성능에 대해 검증되지 않았다”면서 “알칼리금속의 일종인 리튬을 이용해 배터리를 제조하지만 리튬 배터리 화재는 금속 화재로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리튬 배터리 화재는 다양한 요인에 의해 열폭주 현상을 동반하면서 불이 난다. 하지만 리튬금속 화재의 경우 점화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물과 접촉하면 가연성 수소 가스와 함께 열이 방출돼 폭발화재로 이어질 수 있다”며 “이 때문에 리튬금속 화재와 리튬 배터리 화재 진압에 차별화를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상황인데도 서울시의 D급 소화기 배치 내용을 담은 보도자료는 이미 수많은 언론을 통해 보도됐다. 이를 두고 자칫 D급 소화기가 배터리 화재 진압용 소화기로 인식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진다. 우리나라는 아직 배터리 진압용 소화기에 대한 법적ㆍ인증 기준조차 없다는 점도 문제로 꼽힌다.
<FPN/소방방재신문> 취재 과정에서 서울시가 D급 소화기를 비치하겠다는 기존 보도자료를 부랴부랴 변경하는 황당한 일도 벌어졌다. 서울시는 8일 배포한 보도자료에 있던 ‘D급 소화기’ 문구를 어느샌가 ‘전용 소화기’라고 고친 것으로 확인된다.
궤도 모터카 대책을 수립한 서울교통공사 관계자는 “D급 소화기가 리튬 배터리 (화재에) 적응성이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면서 “행정안전부 재난안전제품 인증을 받은 소화기를 구매할 예정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같은 전용 소화기에 대한 시선도 곱진 않다. 설령 배터리 화재에 적응성을 지닌 소화기가 있어도 화재 시 활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휴대폰이나 노트북, 전자기기 등 소규모 배터리 화재에 대해선 효용성이 있을지 몰라도 전기버스나 궤도 모터카 등에 쓰이는 대형 배터리는 철제 케이스 등으로 둘러싸여 장착되는 만큼 이를 쉽게 소화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지적이다.
강경석 구리소방서 화재조사관(재난과학박사, 리튬이온 배터리 열폭주 세부전공)은 “전기버스 등에 탑재된 리튬이온 배터리는 모듈 형태로 견고하게 장착돼 소화약제 등의 침투가 어렵다”며 “119 신고 후 인명 대피 시간을 확보하는 등의 목적으로 소화기를 사용할 순 있겠지만 진압을 위한 사용은 피해야 한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대용량 배터리 화재 시에는 불길이 주변으로 퍼지지 않도록 막거나 신속한 인명 대피를 위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영주 경일대학교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서울시에서 추진하는 대책은 위험 저감이나 실효성을 보장하긴 어렵다”며 “시민의 불안감을 해소한다는 명목하에 검증되지 않은 기술이나 제품을 도입하는 건 혈세를 낭비하는 것과 같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리튬 금속과 리튬이온 배터리 화재는 양상이 다르다. D급 소화기를 전기버스 등에 비치한다 해도 배터리 화재에 대한 적응성을 기대하긴 어려우므로 추진 정책을 재고해야 한다”며 “초기 진압은 현실적으로 힘들기에 소방대 도착 전까지 화재 확산 방지와 대피 중심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누리 기자 nuri@fpn119.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