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에는 탱크도 만들 수 있는 기계설비 대원이 있다 지난 호에 언급했듯이 남극에서의 체류 시간이 길어지면서 유통기한이 지나거나 열심히 소비해 버려 부족한 물품들이 발생했다. 신선 제품은 진작에 바닥이 났고 컵라면과 같은 간식부터 기호식품까지 귀해지는 품목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그중 일주일에 단 두 번 제공되는 주류 역시 바닥을 보였다. 하지만 이렇게 부족한 물품이 있다면 총량의 법칙에 따라 남는 물품도 존재하게 된다. 그중 한국에서 종종 이슈로 등장하는 쌀 소비 감소가 남극에서도 존재했다.
특히 일 년 동안 먹을 양을 계산해 한국에서 가져온 쌀 외에 전 차대가 남기고 간 쌀까지 더해지니 여전히 창고엔 쌀이 수북했다.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는 쌀 소비를 위한 행사로 떡 만들기를 하거나 수제 막걸리 만들기를 하곤 했다.
그렇게 가끔 만드는 막걸리 덕에 실제로는 부족하지 않았지만 부족하다고 느낀 주류의 심적 공허함을 해결하기도 했다. 심적 공허함을 달래는 횟수가 증가할수록 시판되는 막걸리보다 더 맛있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 횟수가 그리 많진 않았던 터라 그래도 묵은쌀은 항상 여유 있게 창고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잠시 먹고 사는 문제를 고민해야 했던 선조들이 이걸 봤다면 매우 흡족해했을 것 같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우린 전 차대가 남기고 간 묵은쌀을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소비할까를 고민하던 중 수제 막걸리를 이용한 증류식 소주를 만들어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하지만 술을 만드는 건 대장님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일이다.
“점점 바닥 나는 주류창고 때문에 대원들의 걱정이 상당하고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요”
대장님께선 수제 막걸리를 이용한 증류식 소주 제조를 허가해 주셨다. 다음 문제는 어떻게 증류식 소주를 만들 장비를 구하느냐였다.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에 탱크도 만들 수 있다는 청계천 공구 거리가 있다면 남극엔 말만 하면 뭐든 뚝딱 만들어주는 기계설비 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계설비 대원은 조리 대원으로부터 증류식 소주 만드는 방법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재료만 있다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증류주는 식물 등을 발효해 생성된 발효 물을 증류시켜 만든 술을 의미한다. 즉 막걸리를 먼저 만들고 증발ㆍ냉각을 통해 소주를 추출해야 한다. 가장 먼저 필요했던 건 막걸리를 증류시키기 위한 용기였다.
소주에 진심인 해양과학 대원 등 몇 명이 모였다. 그들은 소줏고리 사진을 보면서 기계설비 대원과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해 깊이 있는 의견 교환을 했다.
이때 조리 대원이 지나가는 말로 “지난번에 고장 나서 버린 압력밥솥으로 만들면 되겠구먼”이라고 하자 ‘아 왜 그걸 생각 못 했지’ 하는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살피며 버려진 압력밥솥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남극이라 폐기물을 버렸다 한들 한국으로 반출하기 위해선 폐기물 컨테이너로 갈 수밖에 없다. 다행히도 압력밥솥은 반출용 폐기물 컨테이너에 잘 보관돼 있었다.
그렇게 버려진 압력밥솥을 찾아온 후 인터넷상에 떠도는 소줏고리 사진을 번갈아 봤다. 어떻게 완성할지 잠시 고민하던 기계설비 대원은 필요한 재료와 장비를 챙겨 주말에 만들겠다고 했다.
드디어 찾아온 주말. 대원들의 많은 관심 속에 압력밥솥을 이용한 장보고식 소줏고리가 탄생했다. 그리고 오늘을 위해 통신 대원이 만든 수제 막걸리를 사용해 장보고 과학기지의 첫 증류식 소주가 탄생했다.
하지만 결과는 아쉽게도 실패였다. 실패라기보단 장보고식 소줏고리를 처음 사용하며 생긴 오류라는 표현이 맞았다. 증기를 냉각시키는 동관을 자르고 용접해 이어 붙이는 과정에서 생긴 미세한 동관의 가루들이 묻어 나왔기 때문이다. 소주에는 참치 횟집에서 뿌려주는 금가루처럼 동관의 불순물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시행착오를 거치고 한 주가 지난 후 장보고 증류식 소주를 만날 수 있었다. 저녁에 모두 모여 시음을 했다. 맥주를 즐기긴 하지만 술맛을 잘 모르는 내 느낌을 말하자면 향은 싱글몰트 위스키를 개봉했을 때 나는 고유의 향에 복숭아 향이 살짝 섞인 것 같았다.
일반 화학식 소주와는 다르게 약간의 점도가 느껴져서 그런지 목 넘김은 묽은 마즙을 삼키는 느낌이었다. 알코올 도수가 꽤 높은 것 같았다.
지금까지 나열한 어설픈 표현들을 요약해보면 중국 요릿집에서 판매되는 공부가주를 마시는 느낌이었다. 술도 술이지만 남극에서의 고립된 시간이 길어지면서 각자 여러 가지 일로 불편하고 부족함을 느끼는 가운데서도 이런 이벤트를 통해 즐거움을 얻고 좋은 추억을 만들고 있는 우리 10차대를 보면서 ‘참 좋은 대원들과 함께 근무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날 이후로도 서너 번 정도 증류식 소주를 만들어 먹었다. 하지만 그 과정이 복잡하고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는 데다가 만들어지는 소주의 양도 많지 않았다. 극야가 끝나고 새로운 하계시즌을 맞이하느라 바쁜 우리에게 큰 관심을 받지 못했던 이유다.
지금 글을 쓰면서 든 생각인데 장보고식 소줏고리의 행방이 궁금해졌다. 소줏고리의 인수인계가 잘 됐다면 지금도 장보고 과학기지에서 활동하고 있을 테다. 아니라면 기지 구석 어딘가에 잘 보관돼 있었으면 좋겠다. 다시 장보고식 소줏고리로 만든 복숭아향의 독한 증류식 소주를 마셔볼 날이 있을까?
영하 27℃가 봄 날씨라고? 극야는 끝났지만 날씨는 악천후가 계속되고 있었다. 영하 30℃ 이하의 기온과 강풍이 지속되면서 극야가 끝나고 약 2주간은 정상적인 야외활동이 거의 불가능했다. 야외활동이 어려워지면서 극야가 끝나면 해야 하는 여러 과제가 뒤로 밀리고 있었다. 다들 날씨만 좋아지면 언제든지 바로 나가서 야외활동을 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우기 바빴다.
특히 해양과학 대원은 8월 말까지 해빙 코어를 채취해야 하는 일정이 있던 터라 날씨에 항상 귀 기울이며 호시탐탐 기회를 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바람이 잦아들고 날씨도 화창한 날을 맞이해 해빙 코어를 채취하기로 했다.
오전엔 코어를 채취할 위치와 그 장소로 설상차의 진입이 가능한지 확인하고 점심 식사 후 해빙 코어를 채취하기로 했다. 점심 식사 후 밖으로 나온 우린 너무 좋은 날씨에 순조롭게 작업이 진행되리라고 생각했다.
해양 대원은 작업하면서 음악을 듣기 위해 무선 블루투스 스피커까지 준비해 왔다. 설상차를 타고 해빙으로 진입하면서
“오늘은 완전 봄 날씨네” “안전 대원님, 그래도 영하 27℃ 예요”
내 말에 누군가 답했다. 하지만 바람도 없고 태양이 강하게 내리쬐고 있어 그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춥다고 느끼지 못했다.
우린 기지에서 500m가량 떨어진 해빙 위로 설상차를 타고 진입해 장비를 내렸다. 작업준비는 순조로웠다. 설상차를 운전해 온 중장비 대원은 작업과정을 영상장비로 촬영하겠다며 카메라를 설치했다. 해양 대원은 작업 선반을 펼쳐 블루투스 스피커를 연결해 음악을 틀었다. 봄 소풍을 온 듯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작업에는 극야 기간 실내에 갇혀 지냈던 조리 대원도 함께했다. 필요한 장비들을 세팅하고 해빙 코어를 채취할 위치의 GPS를 확인한 후 작업이 시작됐다. 첫 번째는 순조롭게 해빙 코어를 채취할 수 있었다.
더는 해빙 코어 장비가 움직이지 않았다. 앞으로도, 뒤로도 꿈쩍하지 않았다.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당황했지만 우린 금방 해결될 거로 생각했다. 전동드릴을 제거하고 수동으로 돌려봤지만 수동 손잡이가 휘어져 버렸다. 그렇게 코어 채취 장비는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마치 영국 영웅 아서왕의 성검인 엑스칼리버가 돼버렸다. 선택받은 자만이 뽑을 수 있는 엑스칼리버를 현장에 있던 모두가 뽑지 못했다.
결국 해빙 코어 경험이 많고 빙하 박사님인 대장님께 무전으로 조언을 구했다. 뭐든 척척 해결하는 기계설비 대원인 유지 반장까지 현장에 와서 해결하려 했으나 우리 중 누구도 엑스칼리버를 뽑을 수 있는 자가 없었다.
극야가 끝나긴 했지만 아직 해가 짧았던 터라 금방 해가 지기 시작했다. 일부에서는 포기하고 복귀했다가 내일 와서 다시 시도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내일이 되면 더 단단하게 얼어붙을 수 있다는 우려로 오늘 반드시 해결하기로 했다.
해가 지자 추위가 엄습해왔다. 하지만 더 어두워지기 전해 해결해야겠다는 의지로 기지에서 온갖 장비를 총동원해 코어 장비 주변에 구멍을 내고 수작업으로 주변 얼음을 깼다.
그렇게 장장 두 시간가량 수작업하고 나서야 결국 얼음에 박혀버린 장비를 수거할 수 있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매우 어두워져 있었다. 우리의 얼굴 주변에는 상고대가 활짝 피었다.
봄 날씨라면서 봄 소풍처럼 나온 해빙 코어 채취 작업은 전혀 상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렇게 해빙에 박힌 장비를 수거하고 철수 준비를 하다 보니 중장비 대원이 설치한 카메라는 강추위에 작동을 멈춰버렸다. 블루투스 스피커의 음악은 언제 꺼졌는지도 모르게 나오지 않았다.
어느 누가 영하 27℃의 날씨를 봄 날씨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우린 누가 뭐래도 그날은 봄날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소망 풍선 날리기 “남극에서 소망 풍선을 날린다”고 말하면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환경운동가들이 기가 막혀 할 노릇일 거다. 하지만 우린 수차례 소망을 풍선에 적어 남극 하늘로 올려보냈다.
남극은 환경오염을 예방하기 위해 야외활동 중에 발생하는 사소한 쓰레기는 물론 사람의 배설물까지 모두 수거해 온다는 데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냐고 말하는 이들도 있을 테다. 우리가 하늘로 올려보낸 소망 풍선은 사실 단순한 풍선이 아닌 연구 장비의 일종이다.
이 장비는 기상 대원과 대기과학 대원이 남극의 오존 소멸의 정도와 시기 등의 관측에 필요한 오존농도 등을 측정하는 오존 존데(sonde)다. 헬륨이 채워진 풍선에 매달아 하늘로 올려보내는데 남극의 오존 구멍을 관찰해 남극 상층의 오존분포 연구의 귀중한 자료를 수집한다.
이때 우린 풍선에 우리의 소망을 적어 남극 하늘로 날리고 그 장면을 영상에 담아 멀리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 보내곤 한다. 친구의 결혼을 축하하는 영상을 만들어서 보내는 대원도, 가족의 생일 축하나 건강, 안녕을 비는 대원도 있었다.
하지만 이 오존 존데를 날리는 시기도 8~10월 정도로 한정돼 있어 미리 기상 대원이나 대기 대원에게 예약해야 가능한 일이다.
나 역시 우리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며 소망 풍선을 남극 하늘로 날려 보냈다. 덕분에 우리 가족은 지금까지 안녕했으며 앞으로도 안녕하리라 믿고 있다.
경기 파주소방서_ 김성한 : sunghan21@gg.go.kr
<본 내용은 소방 조직의 소통과 발전을 위해 베테랑 소방관 등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 2019년 5월 창간한 신개념 소방전문 월간 매거진 ‘119플러스’ 2025년 1월 호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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