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인계식 그리고 우린 말년병장 유류 하역작업까지 무사히 마치고 마지막 활동을 월동보고서에 넣었다. 11차 안전대원에게 최종 인수인계까지 마친 후 그렇게 기다리던 인수인계식을 치르게 됐다.
인수인계식에는 특별한 세레머니가 있는데 보통 전차대가 아끼던 물건 등 상징적인 선물을 전달한다. 나는 9차 안전대원에게 구조의 상징인 구조 도끼를 받았다.
뭘 선물하는 게 좋을지 고민하다 그간 기지 내 야외활동 시 안전모 착용을 정착하기 위해 항상 쓰고 다녔던 게 떠올랐다. 그래서 분신과도 같던 노란색 안전모를 11차 안전대원에게 전달하기로 했다. 기지 내 안전에 대한 당부와 함께….
인수인계식은 10차 장보고 과학기지 월동연구대의 공식 업무 종료와 같다. 이제 무사 귀국만이 남았기 때문에 군대로 치면 말년병장 모드에 돌입한다는 의미다.
인수인계식을 마친 후 아라온호를 타고 출남극 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사흘이. 별다른 일과 없이 자유롭게 기지 내에서 생활하면 된다. 이때 마지막으로 기지 주변을 돌아보며 앞으로 다시 못 볼 남극의 모습을 눈에 담고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마음이 통하는 대원 몇 명과 함께 기지 뒤에 있는 백두봉에 올랐다. 백두봉 정상에서 기지와 테라노바 만의 해빙,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니 지난 일 년 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며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함께한 대원들이 옆에 있어 꾹 참았는데 밖으로 흐르지 못한 눈물이 부비동으로 흘러들었는지 콧물만 나왔다.
1년 동안 평안하게 잘 지냈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고생한 일도, 고립돼 지내는 답답함으로 우울해질 때도 있었다. 극야기간에는 불면증으로 꽤 힘든 시간을 보냈다. 이러한 모든 일이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니 뿌듯하기도 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쳤다.
그렇게 우린 몇 분간 말없이 백두봉 정상에서 고요한 남극을 바라보며 각자의 남극 일 년 살기에 대한 회고와 함께 앞으로의 다짐을 하고 있었다.
뒤로는 끝없이 펼쳐진 설경과 이름 모를 봉우리들, 앞으로는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과 해빙 끝에 하늘이 맞닿은 푸른 남극의 바다. 이 모든 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더 오랫동안 눈에 담아 평생 기억하고 싶었다.
그렇게 4박 5일 동안 11차대 월동연구대가 정성껏 준비해주는 식사를 마음 편하게 즐기며 여유 있고 차분하게 우리의 추억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남극을 떠나다 “통신실에서 알려드립니다. 1항차 아라온호로 출남극 하시는 분들께서는 오후 2시까지 수화물을 챙겨 본관동 앞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안내 방송이 스피커를 통해 본관동 전체에 울려 퍼졌다. 이미 오전부터 모든 짐을 다 싸서 방을 정리하고 나온 터라 갈 곳 없이 본관동을 어슬렁거리며 마지막으로 주변 시설을 둘러보던 차였다. 방송을 들으니 ‘이제 정말 떠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 기지를 떠나는 인원은 10차 월동대 외에도 KBS 빙하다큐 팀을 비롯한 연구자들도 포함돼 있었다. 출발 1시간 전부터 본관동 앞에는 화물을 정리하고 싣는 사람들과 우리를 배웅하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11차대 대원들의 도움으로 화물을 싣고 설상차에 연결된 인원수송 컨테이너에 탄 후 아라온호가 있는 기지 앞 해빙으로 떠날 준비를 마쳤다. 기지에 남아있는 연구대원들과 11차대 일부 대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설상차와 함께 해빙으로 들어섰다.
덜컹거리는 인원수송 컨테이너에서도 모두 밝게 웃으며 수다를 떠는 모습이 마치 군대 전역 날 GOP에서 연대 본부로 내려오는 군용트럭 화물칸에 탑승한 전역자의 표정과 흡사해 보였다. 그렇게 아라온호 앞에 도착한 우린 단체 사진을 촬영한 후 각자 짐을 챙겨 탑승을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11차 안전대원과 악수하며 앞으로의 1년을 무사히 보내라는 응원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돌아서는데 11차 안전대원이 불러세웠다.
“한국 가서도 꼭 연락하고 지내요”
다시 한번 포옹을 한 뒤 제일 마지막으로 아라온호에 올랐다.
아라온호 생활 아라온호에 오르자 선실이 어떻게 배정될지에 관심이 쏠렸다. 아라온호의 선실은 1인실부터 다인실까지 다양했다. 뷰가 좋은 방을 원하는 대원, 1인실이나 2인실을 배정받아 다인실을 피하고 싶은 대원, 친한 대원과 같은 방을 배정받길 원하는 대원 등 각자 원하는 바가 달라 모두 방배정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나는 무난하게 2인실 방으로 배정받았다. 창이 없는 방이라 조금 아쉬웠지만 파도가 심해 멀미 나는 날은 불을 끄면 온종일 캄캄해서 잠을 청할 수 있어 좋았다.
그렇게 각자 방을 배정받고 12박 13일간의 연구 항해가 포함된 귀향길에 올랐다. 목적지는 입남극 할 때와 같은 뉴질랜드의 리틀턴 항이었다. 아라온호에 탑승한 우린 파병을 마치고 무사히 귀향선에 탑승한 군인들 같았다.
가장 우릴 반갑게 한 건 남극에서 먹지 못한 새로운 먹거리들이었다. 일전에 다뤘던 제로 콜라 에피소드 덕분에 일 년간 맛보지 못했던 제로 콜라가 우리를 반겼고 새로운 아이스크림과 과자들이 즐비했다. 식사시간에는 신선한 과일과 채소들이 항시 제공돼 식욕을 자극했다.
하지만 그 식욕은 오래가지 못했다. 테라노바 만을 떠나 리틀턴 항을 향하는 바닷길은 거칠었고 그로 인해 멀미가 심해 식사를 못 하는 대원이 늘었다. 나는 다행히 멀미가 심하진 않았다. 그런데도 바다가 거친 날엔 신생아처럼 온종일 먹고 누워만 있었다. 그런 날은 며칠씩 이어지기도 했다.
바다가 잔잔할 땐 좌우로 흔들리는 배에서 러닝머신 위를 달리거나 1일 1 사우나를 하면서 아라온호에서의 생활을 즐겼다. 그렇게 아라온호에 적응할 때쯤 갑판에 나가면 하루하루 다르게 바닷바람이 따뜻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러던 2023년 12월 22일 저 멀리 육지가 눈에 들어왔다. 푸르른 육지를 아라온호 갑판 위에서 한참 바라봤다. 남극에 있으면서 그렇게 보고 싶던 자연의 푸르름을 보는 감격스러운 기분을 오랫동안 느끼고 싶어 갑판 위에서 달리기를 했다.
뉴질랜드의 강렬한 태양과 푸르름이 가득한 공기를 마시며 한 시간가량 달렸다. 땀을 흘리니 너무나도 기분이 상쾌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때의 오감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그렇게 12박 13일의 항해를 무사히 마치고 리틀턴 항에 도착했다.
반갑다 육지야 리틀턴 항에 도착한 다음 날 출입국 심사를 마치고 리틀턴 항에 내렸다. 배에서 내려 땅에 입맞춤하는 모습을 영화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 왜 그런 세리머니를 하는지 충분히 이해가 됐다.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그러고 보니 남극에서 일 년간 생활하면서 수없이 말할 수 없는 감격의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그만큼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지 않았나 싶다.
배에서 내려 리틀턴 항 주변을 둘러보는데 마침 인근에 시장이 열린 날이라 사람도, 간이 매장도 많았다. 그 모습을 보니 ‘이제 다시 사회 속의 일원이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모든 게 반갑고 즐거웠다.
행복한 귀로 출장 그리고 귀국 앞으로의 일정은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항공기를 타고 호주 시드니로 이동해 한국으로 가는 거였다. 귀국하는 과정에서 기상 악화 등 일정 변경의 가능성과 위로 휴가의 개념으로 이동 일정이 여유롭게 잡혔다. 그렇게 6박 7일간의 시간이 귀로 출장이라는 이름으로 주어졌다.
우린 크라이스트처치에서 2일, 시드니에서 4박 5일을 보낼 기회가 생겨 그간의 여독을 풀 수 있게 됐다. 푸른 자연이 그리웠던 대원들은 뉴질랜드 자연풍경과 함께 트레킹을 하거나 곤돌라를 타고 주변 경관을 관찰하며 보냈다.
또 나를 포함한 일부 대원은 그동안 스크린골프연습장에서 연습한 기량을 확인하기 위해 도심 공원에 있는 골프장에서 골프를 즐기며 거닐기도 했다. 그렇게 각자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며 귀국을 준비했다.
남극의 설원에서 보지 못한 푸르름의 갈망이 너무 심했던 탓인지 호주에서조차 블루마운틴을 방문해 트레킹을 하고 대부분 시간을 주변 바다와 공원을 거닐며 여유롭게 보냈다.
마지막으로 한국보다 2시간 빠른 시드니에서 새해 맞이 불꽃놀이를 뒤로하고 1월 1일 아침 대한민국 인천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시드니에서 국적기에 탑승하니 금방이라도 한국에 도착할 것만 같았다.
“잠시 후 우리 비행기는 대한민국 인천공항에 착륙하겠습니다”
기내 방송을 듣는 순간 ‘아 이제 드디어 끝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잠시 울컥했다. 하지만 그런 기분을 느낄 새도 없이 휴대전화의 전원을 켜는 순간 많은 지인으로부터 귀국 축하 메시지가 와 있었다. 그중 가장 보고 싶었던 우리 가족이 이미 한 시간 전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다는 메시지가 눈을 사로잡았다.
출국장을 나서는 순간 너무나 커버린 사춘기 두 아들의 어색한 미소에 놀랐다. ‘1년이라는 시간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커버렸다니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떠나 있었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밝게 웃고 있는 여전히 아름답고 고운 아내의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우리의 반가운 만남을 뒤로하고 짧은 귀국 행사를 마친 후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현관 앞에는 1년 동안 그렇게 먹고 싶었던 매운 엽기떡볶이가 배달돼 놓여 있었다. 남극에서 수차례 인터넷에서 떠도는 레시피로 조리해도 그 맛을 낼 수 없었는데 드디어 맛볼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곧바로 집을 떠나야 했다. 귀국하면서 소방의 선배이자 친한 형님 아버님의 부고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지난 1년간 남극에 있으면서 경조사를 챙기지 못해 친한 지인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방문한 장례식장에서 형님은 선뜻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남극의 강렬한 태양 아래 검게 그을린 얼굴과 1년간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은 장발의 모습이 낯설었을 테다. 게다가 아직 귀국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에 당황스러워했다.
그 이후로도 장발과 검게 그을린 얼굴 때문에 많은 사람이 적응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렇게 한국에서의 새로운 일상이 시작됐다.
다시 만난 우리, 다시 남극으로 떠나는 이들 귀국 후 가족들과 며칠간의 휴가를 즐겁게 보냈다. 첫 출근을 하면서 업무 복귀 후 새로운 생활을 한 지 한 달이 지나고 우린 다시 모였다. 장보고 과학기지 10차 월동연구대와 세종과학기지 월동연구대의 해단식이 열렸다. 이날 행사에서 감사하게도 일 년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모범극지인상’을 받았다.
해단식 행사가 끝나고 저녁 식사를 하면서 앞으로 주기적인 만남을 위한 모임을 만들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2024년 10월, 8개월 만에 10차 월동대의 첫 정기모임을 갖게 됐다.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들을 마주하니 다시 장보고 과학기지 식당에 모여 앉은 듯했다. 우린 그동안의 안부를 묻고 여러 소식을 전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중 귀국한 지 1년도 안 됐는데 능력이 뛰어난 통신대원과 발전대원이 12차 월동연구대로 다시 장보고 과학기지에 간다는 게 가장 쇼킹한 소식이었다. 나 역시 다시 한번 기회가 된다면 가보고 싶고 기지에 가면 모든 게 반갑긴 할 것 같다.
하지만 한국에 와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 지 1년도 안 된 시점에서 다시 남극으로 돌아간다는 건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었다. 두 대원이 그런 결심을 했다는 게 대단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다시 가고 싶다고 무조건 선발되는 것도 아닌데 또다시 선발된 그들의 능력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다시 만난 사람들은 월동연구대뿐만이 아니었다. 빙하라는 주제로 다큐멘터리 촬영을 왔던 KBS 다큐팀과도 기지에서 그리고 귀국하는 아라온호에서 친분을 쌓고 지낸 터라 한국에 가서도 한번 만나자는 약속을 지켰다.
기지에서 함께 스크린골프를 치며 한국에서의 저녁식사 내기를 한 적이 있는데 그 약속을 지키게 됐다. 필드에서 기상대원과 함께 골프를 즐기기도 했다.
아직도 우리 10차 월동연구대와 KBS 다큐팀 등 남극에서 만난 인연들은 안부를 주고받으며 그때를 추억하곤 한다. 평범한 일상이라면 그냥 스치는 인연일 수도 있었는데 남극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만난 우리의 인연이 다른 인연들보다 확연히 각별하게 느껴진다.
캄캄한 밤이 지속되던 극야기간 불면증으로 늦은 새벽 기지 복도를 배회하다 만나 서로 멋쩍은 웃음을 보였던 대원, 멜버른산에 고립돼 추위에 떨며 하염없이 함께 구조헬기를 기다리던 시간, 영하 30℃가 넘는 추위에서도 시설보수를 위해 야외작업을 했던 대원들, 차가운 남극의 밤하늘 아래 쏟아지는 오로라를 함께 보며 신기해했던 시간들….
이렇게 꿈만 같던 특별한 매 순간을 함께한 우리. 또다시 만날 그날을 기약해 본다.
마치며
이런 선택을 존중해주고 응원해 준 가족들과 나를 항상 지지해주는 주변 동료들, 지인들 덕분에 무사히 남극으로 떠날 수 있었다.
예상 일정보다 1개월가량 늦게 입남극 하면서 도착하자마자 해상하역을 하고 모든 게 바쁘게 진행됐다. 해상하역을 시작으로 남극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의 모든 일이 대부분 처음 경험해보는 업무였다. 처음 접하는 작업에 대해 안전교육을 하고 함께 작업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과거 경험이 있던 대원들의 의견을 듣고 이전 차대의 업무기록들을 확인하는 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현장에서 구급대원으로 활동하던 한국에서의 업무와 동떨어진 산업안전에 관한 업무가 주를 이루는 것 또한 파견 초기에 적응하기 어려운 점 중 하나였다.
이런 여건 속에서도 1년간 안전전문가로 기지의 안전을 책임져야 했다. 사고 예방을 최선의 과제라고 생각하면서 안전 교육을 하고 보호구 착용을 일상화하도록 솔선수범하면서 사고를 사전에 방지하고자 노력했다.
안전대원 임무에 대한 역할도 중요하지만 18명이라는 인원이 한정된 공간에서 생활해야 하기에 대원들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대원과 소통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남극에서의 생활은 혼자만의 시간도 중요하지만 함께 작업하고 생활하는 공동체 내 대원 간의 관계에 대한 역할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원만한 대인관계가 기지에 또 다른 안전을 확보해 주는 역할을 했다.
우린 각자의 생활방식과 경험에 의한 자기만의 주관적인 생각이 옳다고 믿고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남극에서도 종종 발생하곤 한다. 하지만 안전에서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매뉴얼이나 지침서 등의 이름으로 여러 가지 기준을 제시한다.
남극의 안전은 아시타비(我屍他比), 요즘 유행하는 신조어로는 내로남불과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안전대원의 역할 수행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런데도 어려운 남극의 안전을 지켜낸 건 10차 월동연구대 모든 대원의 안전에 대한 이해와 함께 소통하며 업무에 협조해줘서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경험을 중시하는 난 남극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통해 많은 걸 보고, 느끼고, 배웠기에 평생 잊지 못할 뜻깊은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좋은 추억과 경험할 기회를 만들어 주고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모든 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특히 기도로 응원해주신 부모님 그리고 가장의 빈자리에도 씩씩하게 잘 성장해준 우리 선율, 은율이와 남편의 빈자리를 채우며 가장의 역할을 너무나도 잘해준 아름답고 현숙한 우리 아내 유조애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우리의 안전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우린 안전했다.
경기 고양소방서_ 김성한 : sunghan21@gg.go.kr
<본 내용은 소방 조직의 소통과 발전을 위해 베테랑 소방관 등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 2019년 5월 창간한 신개념 소방전문 월간 매거진 ‘119플러스’ 2025년 4월 호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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