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31일 문경 육가공품 제조공장에서 발생한 화재 현장에 출동했던 119구조구급센터 소속 소방관 두 명이 숨졌다.
소방관은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책임지기에 참으로 숭고한 직업이다. 지난해 금산 목조주택 화재와 제주 서귀포시 표선 화재에서 순직한 소방관, 2022년 평택 물류창고 화재에서 순직한 3명의 소방관, 2021년 이천 쿠팡 덕평물류센터 화재로 순직한 구조대장 등 매년 소방관이 죽고 있다. 최근 10년 동안 59명의 소방관이 목숨을 잃었다.
이에 소방청에선 순직 소방관의 수를 줄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지만 또한 중요한 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다. 굳이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들이 겪은 정신적인 상처는 매우 깊다.
지난 2020년 분석 자료에 의하면 2011년부터 2020년까지 64명의 소방관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유는 신변 비관, 가정불화, 직무 스트레스 등으로 다양했다. 소방업무 과정에서 생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밝혀진 것도 7건이나 된다.
2021년 서울신문이 1117명의 소방관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약 40%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소방관의 트라우마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답했고 16.6%가 PTSD를 경험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 설문은 익명으로 이뤄졌지만 완전한 익명성을 보장한 게 아니기에 실제로 PTSD 증상자는 더 많을 거로 추정된다.
트라우마는 큰 상처를 의미하는 라틴어 ‘Trauma’에서 유래했다. 트라우마엔 정신적 상처를 뜻하는 ‘Psychological trauma’와 육체적 상처를 뜻하는 ‘Physical trauma’가 있다. 우리나라에선 주로 정신적 상처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는 트라우마로 겪게 되는 스트레스 장애다. 피해의 직접적인 대상자인 1차 대상자, 가족이나 친인척과 같은 2차 피해자, 재난 상황에 참여했던 구조요원 등과 같은 3차 피해자, 재난이 일어난 지역사회에 거주하는 주민인 4차 피해자, 대중매체를 통해 간접적인 심리적 스트레스를 겪는 5차 피해자까지 피해자의 범위는 광범위하다.
대형 재난이나 참혹한 사고를 경험하면 특정 사건을 직접 겪은 사건 당사자 말고도 지켜보는 가까운 사람들까지 심각한 장애를 겪게 된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회적 인지능력은 다른 생물체보다 월등히 뛰어나서 타인의 표정만 봐도 그 사람의 감정 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 인간은 사회라는 보이지 않는 울타리 안에서 끈으로 서로 연결돼 있고 그 끈을 통해 감정과 생각을 교환한다.
만약 우리가 주변에 조금만 관심을 갖는다면 PTSD를 겪고 있는 사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PTSD를 겪고 있는 사람은 몇 가지 눈에 띄는 스트레스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스트레스 반응은 시간이 지나면서 나아지기도 하지만 몇 주나 몇 달까지 지속되기도 한다. 심한 경우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일도 발생한다.
PTSD의 스트레스 반응 중 가장 먼저 나타나는 건 ‘행동적 반응’이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예민하거나 쉽게 놀라기도 하고, 음주가 늘고 잦은 다툼이 발생하기도 한다.
두 번째는 ‘정서적 반응’이다. 스스로 고립됐거나 버려졌다고 생각하며 쉽게 화를 내고 흥분한다. 사건과 관계있는 장소나 사물, 사람을 회피한다. 가치관이 변하고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낀다.
세 번째는 ‘신체적 반응’이다. 인간의 몸과 마음은 서로 연결돼 있다. 정서적인 문제가 몸으로 나타나는 게 당연한 이유다. 속이 불편해 식사를 잘하지 못하는 건 물론 잠을 자지 못해 피로감이 계속된다. 또 심장이 뛰거나 숨이 차고 초조함을 느낀다. 여성의 경우 생리 주기가 변하기도 한다.
네 번째는 ‘인지적 반응’이다. 기억력이 감퇴하고 사고의 속도와 이해력이 떨어져 판단 장애가 생긴다. 경직된 사고와 집중력 저하를 경험하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트라우마로 인한 PTSD 증상을 겪게 되는 걸까? 우리의 생존 본능 때문이다. 인간의 뇌는 크게 호흡과 심장박동 등 생명 유지 작용을 하는 ‘뇌간’, 두려움ㆍ스트레스와 관계있는 ‘구피질(편도체)’, 이성 작용을 담당하는 ‘신피질(전두엽)’로 구성된다.
인간이 감각기관을 통해 받아들인 정보는 뇌의 편도체를 거쳐 전두엽으로 이동한다. 편도체는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 이성을 담당하는 전두엽과 연결돼 있다. 생존을 위협하는 긴박한 상황이 되면 부신피질에서 코티솔이 분비되는데 코티솔은 전두엽의 기능을 억제하고 편도체의 기능을 활성화시킨다.
코티솔 과다 분비로 전두엽의 기능이 마비되는 현상이 패닉(Panic)이다.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고 먼저 본능적인 생존 모드로 전환하라는 인체 신호다. 인간의 뇌는 신경학적으로 편도체에서 전두엽으로 가는 신경망은 넓고 두꺼운 반면 전두엽에서 편도체로 가는 신경망은 좁고 가늘다. 이로 인해 감정의 뇌가 이성의 뇌를 지배하게 된다.
신피질의 판단 작용은 여러 가지 정보를 토대로 하지만 정서적인 정보가 큰 영향을 끼친다. 정서적 기억은 가장 강력하게 잊히지 않고 일상을 지배하는 기억으로 엄청난 충격과 함께 편도체에 저장된다.
편도체에 저장된 기억은 생존을 위해 중요한 순간 회상된다. 이것이 트라우마로 남아 인간을 괴롭히는 원인이 된다. 이것은 생존을 위한 일종의 방어기제다. 트라우마는 무의식 속에 자리 잡아 오랫동안 인간을 괴롭힌다. 따라서 편도체의 이상기억으로 인한 트라우마 치료 방법은 전두엽을 활성화하는 거다.
한국 사람들은 트라우마로 인한 PTSD를 과소평가한다. 심지어 소방관에게 PTSD는 감춰야 할 병이다. 정신과 상담을 받는 소방관에겐 나약한 사람이라는 인식과 인사상의 불이익, 의견 무시 등 다양한 형태의 불이익이 생기기 때문이다.
트라우마로 겪게 되는 강력한 부정적 감정은 관찰을 통해 보다 그 실체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다. 원인 모를 걱정과 근심에 휩싸이는 사람은 자기 감정의 정체를 보다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그 감정이 분노인지 공포인지 슬픔인지 자문해야 한다. 감정의 원인을 파악하는 과정은 곧 전두엽 활성화 과정이기 때문이다. 전두엽에서 감정을 감당하는 편도체에 신호를 보내 감정과 이성의 조화를 이뤄야 한다. 이 일은 훈련과 연습이 필요하다.
감정을 방출해 줘야만 인간은 신체의 조화를 유지할 수 있다. 감정 방출의 가장 쉬운 방법은 대화다. 인간은 대화를 통해 자신이 알지 못했던 감정 상태를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으며 공포와 슬픔, 분노를 말로 표현할 수 있을 때 그 감정으로부터 해방된다. 이 과정을 통해 편도체의 비정상적인 활동은 점차 줄고 전두엽은 활성화된다. 비로소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되는 거다. 이것이 편도체와 전두엽의 의사소통을 조화롭게 만드는 방법이다.
대화를 위해선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동료나 친구가 있어야 한다. 나의 감정을 받아주고 내가 알아채지 못한 감정도 지적해 주는 동료가 있어야 자신의 건강한 정서를 유지할 수 있다.
감정 방출의 두 번째 방법은 자신을 객관화시키는 글쓰기다.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을 글로 적는 건 나의 감정을 이성과 연결시켜 주는 작업이다. 내가 느끼는 감정의 단어를 적어 세밀한 감정 표현 능력을 갖추는 건 매우 효과적이다.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감정은 내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에 집중해 보자.
나의 감정을 글로 표현하는 순간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의 실체에 보다 가깝게 접근할 수 있고 그때 감정이 순화된다. 자신의 감정에 대한 해석력이 증가하면 타인의 감정에 대한 해석력 역시 높아진다. 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거다.
세 번째는 종교 생활이다. 종교 생활은 PTSD를 극복하는 매우 좋은 방법이다. 칼 마르크스는 종교를 인간을 나약하게 만드는 아편이라고 규정했지만 인간이 초인의 경지에 이르지 않는 이상 종교는 마음의 안식처가 된다. 인간은 약한 존재이기에 친한 친구일지라도 배신을 경험하곤 한다. 하지만 종교는 그런 위험이 없다. 그러므로 친구보다 더 큰 의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종교는 나의 감정을 내려놓고 무거운 짐을 벗게 해준다. 한 발짝 물러나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는 힘을 준다.
마음을 다스리고 지키는 건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특히 동료와 친구가 죽어가는 참혹한 상황을 직접 경험한 사람은 더욱 그렇다. 재난이 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재난이 발생했을 때 그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 또한 중요하다는 걸 명심하자.
※ 외부 필자의 기고 및 칼럼 등은 FPN/소방방재신문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훈 리스크랩 연구소장(공학박사/기술사)은 * 서울과학기술대 공학박사(안전공학) * 리스크랩(김훈위험관리연구소) 연구소장 * 현대해상 위험관리연구소 수석연구원 * 한국소방정책학회 감사 * 한국화재감식학회 정보이사 * 소방청 화재감식 자문위원 * 한국지역정보개발원(KLID)평가위원 *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평가위원 * 국립재난안전연구원(NDMRI) 평가위원 *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KEIT) 평가위원 * 한국에너지기술평가원(KETEP)평가위원 * Crane & construction Equipment 칼럼리스트 * 소방방재신문 119 Plus Magazine 칼럼리스트 * 세이프티퍼스트닷뉴스 칼럼리스트 * 기술사(국제기술사, 기계안전기술사, 인간공학기술사) * 미(美)공인 위험관리전문가(ARM), 미(美)공인 화재폭발조사관(CFEI) * 안전보건전문가(OHSAS, ISO45001),* 재난관리전문가(ISO22301,기업재난관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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