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디지털 미디어와 정치적 양극화 속에서 점점 더 흑백의 이분법에 갇혀가고 있다. 차별 옹호냐 차별 철폐냐, 안전이냐 자유냐, 전통이냐 혁신이냐, 보수냐 진보냐, 선이냐 악이냐. 복잡다단한 현실은 이렇게 단순한 구도로 환원된다. 이제 중립적 태도는 용납되지 않는다.
침묵하거나 중간 입장을 취하는 이조차도 ‘적의 동조자’라는 낙인을 피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위험을 피하고자 사회적 적합성을 기준으로 스스로를 검열하며 ‘안전한 편’에 줄 서기를 선택한다. 현대사회가 이토록 변질된 가장 큰 원인은 소통의 부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말들이 떠돌고 있지만 진정한 의미의 소통은 사라졌다. 정치인들은 복잡한 사회 문제를 단순한 이데올로기로 환원시켜 ‘단순하고 명쾌한 정답’을 내놓으려 한다.
그 결과 정치체계는 모든 사회적 담론을 진보와 보수의 대결 구도로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작동하고 있으며 사회적 담론은 젠더, 역사, 안보 문제에서 ‘옳음과 그름’이라는 양자택일의 구조로 갇히고 있다.
학계와 언론마저도 회색지대의 목소리는 점점 사라지고 중간에 선 사람들은 살아남기조차 힘들어진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는 흐름이다.
오늘날의 상황은 20세기 전 세계를 파멸로 몰고 갔던 전체주의(totalitarianism)라는 악령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전체주의는 국가 권력이 개인과 사회의 모든 영역을 통제하며 사적 자유와 자율성을 철저히 제거하고 국가 이념을 절대화하는 정치 구조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는 복잡한 사회 문제를 단순한 이데올로기로 환원할 때 등장한다”고 경고했다.
그녀는 전체주의를 역사상 처음으로 “개인의 삶 전체를 완전히 정치 권력의 대상으로 삼은 체제”라 규정했다. 20세기는 히틀러와 스탈린이라는 괴물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히틀러는 반유대주의를, 스탈린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내세워 수백만 명을 학살했다.
그들의 시대는 폭력과 억압, 공포 정치로 점철됐다. 우리는 그 시절의 전체주의가 역사 속에 묻혔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형태를 바꿔 다시 돌아왔다.
20세기의 전체주의가 ‘경성 전체주의(hard totalitarianism)’였다면 오늘날 21세기의 전체주의는 ‘중도 전체주의(hybrid totalitarianism)’를 거쳐 ‘연성 전체주의(soft totalitarianism)’라는 새로운 형태로 변신했다.
중국은 디지털 감시를 통해 국민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고 러시아는 민족주의와 종교를 활용해 SNS와 여론을 조작한다. 이러한 모습은 중도 전체주의의 전형이다.
연성 전체주의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침투하고 있다. 팬데믹, 기후변화, 전쟁 같은 글로벌 위기와 정치적 양극화, 포퓰리즘 그리고 디지털 플랫폼의 지배는 연성 전체주의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토양이 되고 있다.
과거의 경성 전체주의가 강압과 폭력, 공개적 검열이라는 거친 도구를 사용했다면 오늘날의 연성 전체주의는 훨씬 더 교묘하다. 빅데이터, 알고리즘, ‘동의’와 ‘참여’, 그리고 문화와 담론이라는 은밀한 도구를 사용한다.
그 결과 사회가 새로운 형태의 전체주의에 물들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기 어렵다. 연성 전체주의는 기술적으로는 디지털 기술과 데이터로, 사회적으로는 문화와 전통, 자유와 인권이라는 ‘선의의 가치’를 도구 삼아 인간을 통제한다. 그래서 더욱 위험하다.
최근 들어 한국 사회는 진보와 보수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하지만 양쪽 모두 연성 전체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진보주의는 평등과 정의, 다양성, 사회개혁을 내세운다. 그러나 이들은 정치적 올바름(PC)을 확대하며 허용된 언어만 사용해야 하는 사회를 만들고 있다. 다양성을 존중하자면서도 환경ㆍ인권ㆍ성 평등 가치에 동의하지 않으면 사회적 낙인을 찍는다.
보수주의는 전통과 질서, 자유시장, 개인 책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국가 안보와 전통을 명분으로 특정 자유를 제한한다. 전쟁과 경제 불안이 커질수록 이런 통제는 강화된다.
결국 진보는 ‘평등과 정의’라는 이름으로, 보수는 ‘질서와 안보’라는 이름으로 전체주의적 기제를 부활시키고 있다. 다만 그 방식은 폭력이 아니라 도덕적 강요와 사회적 낙인, 알고리즘과 플랫폼 통제, 자기검열이라는 보이지 않는 방식일 뿐이다.
현대사회는 너무 복잡하다. 사람들은 피로와 무관심 속에 문제의 핵심을 외면해 버린다. 그러나 이 무관심이야말로 연성 전체주의가 뿌리를 내리는 자양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신(新) 전체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 답은 제도적, 사회적 차원에 앞서 먼저 개인적 차원에서 찾아야 한다.
무엇보다 비판적 사고 능력을 길러야 한다. 개인적 자각과 비판적 사고 없이 대중에 휩쓸리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SNS와 언론에 떠도는 정보와 다수 의견, 담론 등을 비판 없이 따르고 수용하지 말고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 한다.
자기성찰과 용기도 요구된다. 타인의 의견에 종속되는 노예 도덕적 복종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주인 도덕적 자기 창조가 필요하다. 나의 침묵과 순응이 사회적 압력이 아닌 진짜 내 신념인지 점검하고 아니라면 침묵하지 말고 그 타인과 그 공동체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관용과 존중의 태도를 지녀야 한다. 내가 불편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남들의 의견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싫어도 들어 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하며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공동체에 참여해 사고의 폭을 넓힐 줄도 알아야 한다.
이처럼 연성 전체주의는 폭력과 감옥 대신 도덕적 압력과 자기검열이라는 사슬로 사람들을 묶는다. 외형적으로는 자유로운 듯 보이지만 내면은 억압된다.
그러나 각자가 비판적 사고와 성찰, 관용의 태도를 실천한다면 이 은밀한 독재에 맞설 수 있다. 전체주의는 늘 ‘다수의 도덕’과 ‘사유의 빈곤’에서 싹텄다. 그렇다면 해답은 분명하다. 깊이 생각하고 용기 있게 말하며 다양성을 존중하는 시민성. 이것이야말로 디지털 시대의 전체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김훈 리스크랩 연구소장(공학박사/기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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