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난 어두운 방, 자욱한 연기와 함께 고막을 찢는 듯한 경보음이 울린다. 성인조차 앞이 보이지 않는 공포 속에서 얼어붙기 마련인데 아이들은 어떨까? 많은 아이가 무서운 나머지 침대 밑이나 옷장 속으로 몸을 숨긴다. 불행히도 이 본능적인 선택은 아이들을 더 큰 위험으로 몰아넣는 비극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이제 우리는 아이들에게 ‘불이 나면 위험하니 조심해라’라는 단순한 경고를 넘어 공포의 순간에 몸이 먼저 반응할 수 있는 ‘생존 본능’을 선물해야 한다. 즉 위기의 순간에 머리가 아닌 몸이 먼저 반응할 수 있는 훈련된 본능을 선물하는 것이다.
호주나 영국 등 소방 선진국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교육할 때 강조하는 부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아이들을 ‘보호의 대상’에서 ‘안전의 파트너’로 격상시켜야 한다. 호주의 ‘Schools in Fire Country’ 프로그램은 아이들에게 위험을 숨기지 않는다. 대신 아이들이 직접 학교와 집의 대피로를 설계하게 함으로써 상황에 대한 통제력을 갖추도록 유도한다. 우리도 가정에서 아이와 함께 “우리 집에서 가장 안전한 탈출구는 어디일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피난 지도를 그려봐야 한다. 피난 지도를 그려본 아이는 위기 상황에서 숨지 않고 자신이 정한 길을 따라 당당히 탈출한다.
둘째, 머리가 아닌 ‘근육’이 기억하게 해야 한다. 영국 런던 소방청의 철학처럼 화재 현장은 ‘무언가를 배우기에 가장 부적절한 장소’다. 연기 속에서 낮게 기어가는 법(Crawl Low), 옷에 불이 붙었을 때 멈추고 굴러서 끄는 법(Stop, Drop and Roll)은 생각할 틈 없이 반사적으로 나와야 한다. 이를 위해선 ‘근육 기억(Muscle Memory)’이 형성될 때까지 짧고 반복적으로 실습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1년에 한 번 하는 거창한 행사보다 한 달에 한 번 진행하는 5분의 역할극이 아이의 생명을 구하는 결정적 열쇠가 된다.
셋째, 명확한 행동 수칙을 체화시켜야 한다. 영미권의 표준 구호인 ‘Get Out, Stay Out, Call for Help’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 화재 시 아이들은 아끼는 장난감이나 반려동물을 챙기려다 골든타임을 놓치곤 한다. 따라서 ‘일단 밖으로 나가면 절대 다시 들어가지 않는다’는 약속을 놀이처럼 반복 주입해야 한다.
2019년 6월 은명초등학교 화재 사례에서 증명된 교육의 힘인 ‘5분의 기적’은 훈련된 본능이 얼마나 위대한지 명확히 나타낸다. 당시 학교 주차장에서 시작된 불은 순식간에 건물 전체로 번졌고 시커먼 연기가 교실을 덮쳤다. 하지만 그 긴박한 상황에서 방과 후 수업 중이던 116명의 학생과 교사들은 단 5분 만에 전원 무사히 대피했다.
비결은 단 하나, 평소 이 학교가 실시해온 월 1회의 정기 대피 훈련이었다. 아이들은 연기가 피어오르자 당황해 숨는 대신 반사적으로 옷소매로 코와 입을 막고 자세를 낮춘 채 침착하게 운동장으로 나갔다. “연습했던 거랑 똑같아서 무섭지 않았어요”라는 한 학생의 인터뷰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반복된 훈련이 거대한 화마 앞에서도 아이들의 이성을 지켜준 것이다.
안전은 지식이 아니라 태도이며, 나아가 습관이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모든 위험을 막아줄 방패를 줄 수는 없지만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인 ‘훈련된 본능’을 길러줄 수는 있다. 서구의 격언 중 “Practice makes perfect(연습이 완벽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다. 단순히 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몸에 완전히 배어 어떤 상황에서도 사라지지 않도록 반복해야 한다는 뜻이다.
오늘 밤, 집 안의 화재경보기를 함께 눌러보며 그 소리를 ‘무서운 소음’이 아닌 ‘생존의 신호’로 바꾸는 연습부터 시작해 보길 권한다. 아이들의 근육에 새겨진 이 짧은 습관이 훗날 거대한 화마로부터 소중한 생명을 지켜내는 가장 견고한 안전장치가 될 것임을 확신한다.
한국소방안전원 울산지부 유승환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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