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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푸아 뉴기니아 선교지 체험여행기 Ⅱ

오리엔트 김종관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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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관 대표이사 | 기사입력 2006/04/25 [22:30]

파푸아 뉴기니아 선교지 체험여행기 Ⅱ

오리엔트 김종관 대표이사

김종관 대표이사 | 입력 : 2006/04/25 [22:30]

이튿날 미사는 원주민 교우들과 함께 한국어와 현지어인 피진어를 섞어가며 올렸습니다.

해외 선교 사제 생활을 하시며 사제로서의 충만한 기쁨과 열정 속으로 때로는 교만이라는 사탄이 파고들까봐 늘 고심하신다는 장 신부님의 강론 말씀을 수긍하면서 그래도 그런 때라도 있으셔야 이 힘든 생활을 이겨나가시죠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미사 후에는 원주민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방문했죠.

툼바싱싱이란 전통춤으로 또 한참 환영을 받으며 이미 가락에 익숙해진 몇몇 자매님들도 덩실덩실 춤추며 무리에 합류했읍니다.

여기저기 집들은 우리나라 원두막을 키워 논 것 같았고, 집집마다 살림살이는 냄비 하나 솥 단지 하나가 거의 전부인 것 같더군요.

하기사 삶은 바나나나 얆,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니 우리처럼 크고 작은 국그릇, 밥그릇이 뭐 그리 필요하겠어요. 또한 날씨가 더우니 옷도 그다지 필요 없고, 조금만 움직이면 먹거리도 쉽게 구할 수 있으니 이것저것 살림살이를 많이 가질 이유가 별로 없을 것 같더군요.

그러면서도 평화롭게 사는 모습은 우리네 풍요롭지만 각박한 인심보다 한결 여유 있어 보였습니다.

그 분들과 함께 야자나무 기념식수를 하고, 타운에 있는 마당 리조트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는 얼마 전 김명동 총장 신부님께서 사목하셨다는 바나라성당과 소신학교도 돌아보았죠.

바나라성당 인근 마을의 해변경치는 그야말로 하얀 모래와 푸른 바다 높이 솟은 야자나무가 한 폭의 그림 같았습니다.
 
두 번째 방문지는 우리를 인솔하시는 턱수염도 근사한 김순겸 신부님께서 3년 가까이 사목하셨고, 현재는 김일영 신부님이 맡으신 밀림 속 오지에 있는 할로파 본당이었습니다. 가는 길이 좁고 험해 아예 처음부터 짐칸 있는 찦차 두 대를 이용했죠. 이 신부님과 장 신부님 두 분이 운전은 도맡으셨구요.

저는 수술한 허리디스크 때문에 염치 불구하고 앞좌석에 앉았는데 저희 집사람을 비롯한 자매님들 모두는 짐칸에 앉으셔서 차가 심하게 덜컹거릴 때마다 박장대소 하였지만, 저는 무척 미안했답니다.

이럴 때 이런 곳 아니면 언제 이런 짐칸을 타보겠냐고 어린애마냥 모두 즐거워하는 모습에 아마 하느님도 흐뭇해 하셨을 겁니다.

 
꼬불탕 꼬불탕 길을 두 시간쯤 달리자 더 이상 폭우로 차가 갈 수 없는 희망의 다리(이 다리는 김순겸 신부님께서 원주민들과 함께 만든 다리로 주민들에게 희망을 준다는 의미로 그 때 이름 지은 다리라 함)에 도착했죠.

거기서부터 또 걷기를 2시간 반.

울창한 밀림 사이를 마중 나온 원주민 교우들과 안내하는 신학생 두 분의 도움을 받아가며 즉석에서 만든 지팡이를 짚고 올라갔습니다.

거의 정상이 가까워지자, 새로 지어 아담하고 예쁜 초록색 집 두 채가 보이며 거기서 다섯 명의 처녀가 우르르 뛰어 나오더니 김 신부님을 부둥켜안고 반가워 한참을 울더군요.

알고 보니, 신부님 계실 때 갖은 고생을 다해가며 원주민 교우들과 합심해서 그 집을 지으셨고, 그 중 한 채는 성당으로 또 한 채는 수녀님 되기가 소망인 희망자들을 위한 기숙사로 만드신 것이었습니다.

뒤따르던 우리 자매님들도 덩달아 흐느끼시더군요.

잠시 10여명 밖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작지만 동화속의 인형같은 성전으로 들어가 우리 여행에 함께 해주시는 주님께 감사기도 드리고, 눈 아래 펼쳐지는 아름답고 시원하게 탁 트인 주변 산들을 둘러보았습니다.

다시 5분쯤 산모퉁이 하나를 돌자 김일영 가브리엘 신부님이 선교하시는 할로파 본당 초입이었습니다.

현장 학습 나온 우리 학사님 한 분이 언제 가르쳤는지 한국말 노래를 아주 잘 부르며 저희를 맞이했습니다.

이 곳 성당은 워낙 깊은 산꼭대기에 위치하고 오지 밀림 속이라 신자들이 별로 없을 것 같은데, 어디서 왔는지 많은 신자들이 모였습니다.

특히 김순겸 신부님께서 오랫동안 사목하시던 곳이라 만나는 신자들마다 신부님 손을 잡고 반가워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여기서도 어머니회 회원들이 각자 만들어 와서 뷔페처럼 차려놓은 20여 가지 토속음식을 하나하나 맛보며 즐겁게 식사하고, 바로 두 김 신부님께서 집전하시는 미사에 들어갔죠.

김일영 신부님께서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어떻게 이들을 변화시킬 것인가 하고 고심했던 생각이 이제는 이들을 변화시킬 게 아니라 내가 이들처럼 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살을 깎는 인내와 나를 비워야 다른 것이 채워질 수 있다.”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씀하시는데, 체험에서 우러나온 해외선교사제의 고뇌를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어 등단한 턱수염도 근사한 김순겸 신부님.

오랜만에 옛 신자들을 만나서인지 상기된 얼굴로 현지어로 강론을 하시는데 말은 잘 알아듣지 못해도, 그 내용은 정이 뚝뚝 떨어지는 듯 원주민 신자들이 무척 기뻐했습니다. 함께 미사 올린 저희들도 행복했고요.

이제는 하산길, 도착할 때부터 조금씩 내리던 비가 어느새 장대비로 바뀌었습니다.

더욱이 길이 황토 흙이라 어찌나 미끄러운지 곡예 하듯 조심스럽게 한발 한발 앞으로 내딛는데 어느 틈인지 원주민 어린아이들이 하나 둘씩 끼어들며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매님들 손을 꼬옥 잡고 긴 행렬을 지어 내려가는 게 아니겠어요.

비는 계속해서 좍좍 쏟아지고, 모두 물에 빠진 생쥐처럼 옷은 흠뻑 젖었지만, 아이들과 다정하게 손을 잡고 즐겁게 웃으며 얘기하며 주님 안에 하나 되는 순간이었지요.

자매님 몇몇은 미끄러지며 엉덩방아를 찧기도 했지만 그래도 다들 무사히 내려와 그 사이 담뿍 들은 정이 이별의 아픔을 더했답니다.

아마 드라마라도 이처럼 아름다운 장면은 연출하지 못했을 거예요.

이동윤 신부님께서는 차를 가지고 마중 나온 곳이 좀 떨어진 곳이어서 이 장면은 못 보셨을 겁니다.

신부님께서는 낮 동안도 저희들 저녁식사 찬거리 준비하랴, 일정 짜랴, 호텔 체크하랴 등으로 잠시 쉴 짬도 없이 온종일 바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넷째 날도 지나갔습니다.
 
세 번째 방문지는 사이돌 성당.
이곳은 육지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빠른 요트를 타고도 3시간 이상 걸리는 먼 곳이었습니다.

이 신부님께서는 저희를 선착장까지만 태워주고 바로 가셨지만 저희 일행들은 푸른 파도를 가르며 시원한 바닷바람을 일으키는 근사한 요트를 타고 처음에는 모두 신이 나서 왁자지껄 했습니다.

그러나 채 30분도 안돼 배안이 차츰 조용해지더니 한분두분 멀미를 시작, 마침내 인솔하시는 제일 젊은 김 신부님마저도 얼굴이 하얘지시며 난간을 잡고 바다를 향해 배 밖으로 고개를 내미셨습니다.

그래도 저는 속은 약간 메스꺼웠지만 참을 수 있을 정도였고 어느 자매님은 멀미를 이기려고 끊임없이 성가를 부르시더군요.

아마 50곡도 넘게 부르셨을 거예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자연스레 예수님시대의 사도바오로가 떠오르더군요.     우리의 턱수염 김 신부님이 마치 사도바오로 같고 저희들은 전도여행에 따라나선 그 제자들 같았습니다.

외람되게도 아주 조금은 맞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두 시간쯤 지나자 차츰 멀미도 가라앉고, 갑자기 물 위로 튀어 올랐다 사라지는 돌고래도 바라보며 소리를 지르며 일행들이 생기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사이돌 해변가.

썰물로 물이 빠져 배가 접안을 못하자 작은 배를 타고 마중 나온 박영주 신부님 배에 옮겨 타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섬에 오르니 이번에는 대형 농업용 트랙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또 하하 웃으며 원주민들이 번쩍 들어 실어주는 트랙터 뒷 칸에 타고 성당에 도착하니 여기서도 수 백명의 교우들이 환영의 뜻으로 우리들 얼굴에 빨간 물감을 칠해주고 북치고 노래하고 춤추며 귀빈이라도 방문한 듯 대대적인 환대를 해주었습니다.

이번에는 저도 한동안 같이 어우러져 흥겹게 춤을 추었습니다.

거의 해질녘까지 부족마다 다른 고유의 춤과 공연으로 웃음꽃을 피우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죠.

저녁에는 온 동네 신자가 모여 돼지까지 잡아 와 가는 곳 마다 예수님의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의 기적을 체험케 해주는 성찬을 나눴습니다.

환영사에서 이곳 보좌로 계신 박신부님께서 “여기 사시는 원주민교우들은 여러분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분들로 생각하십니다.” 하고 말씀하셨을 때 가슴이 뭉클해지며 부끄러웠지만 더 잘 살아야 한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대신 하신 것이라 여겼습니다.

신학교 5학년을 마치신 학사님 한분도 실습 차 와계셨는데 말라리아에 걸려 며칠째 고열로 고생이 심하다고 하시더군요.

전에도 여러 번 걸렸지만 이번처럼 힘든 적은 없었다고 하시면서도 무거운 가방을 나르는 등 부지런히 일을 하셨습니다.

마침 제가 가지고간 우황청심환이 하나있어 얼른 까드리고, 전에 배워두었던 이침을 즉시 놔드렸죠. 이튿날 아침 이침을 또 놔드리며 물어보니 전보다 훨씬 좋아졌다고 환히 웃으시더군요. 저도 무척 기뻤습니다.

간밤의 숙소는 성당에서 운영하는 여관이었는데 말이 여관이지 이부자리 하나 없는 시멘트바닥 그대로였어요. 먼데서 온 원주민들이 타운으로 가기 위해 하룻밤 묶는 곳인데 대부분 돈도 안받는다더군요.

박 신부님 안내로 원주민들이 묶고 있는 큰방에 들어가 봤는데 7,8명의 사람들이 선물로 가져간다는 돼지와 함께 쪼그려 잠을 청하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우리 자매님들은 두꺼운 메트레스가 준비된 방에서 서울서 가져간 슬리핑백 속에서 주무셨고 우리 형제 셋은 그냥 시멘트바닥에 돗자리 하나 달랑 깔고 슬리핑백을 덮고 잤습니다.

오지게 현지 체험을 한 셈이지요.
 
아침에 원주민 교우들로부터 나무그릇 등 푸짐한 민속선물을 받고 다시 배에 오르는데 이번에도 배가 접안을 못해 작은 배를 띄웠습니다.

해병대 출신의 박 신부님께서는 현지 청년 몇 사람과 함께 계속 바다 속에서 수영하시며 두 배를 안전하게 접근시켜 우리가 무사히 요트에 오르도록 도우셨습니다.

수영을 잘 하신다고는 하지만 흔들리는 두 배와 출렁이는 파도사이가 위험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데도 자신을 돌보지 않고 분주히 왔다 갔다 하시는 사제의 모습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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