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행선지는 마당 교구 행사 때 자주 이용한다는 "섹"피정센타. 배를 타고 갈 때와는 달리 이미 한 번 경험을 해서인지 아니면 한 자매님의 이혈침 덕인지 다행히 한 사람도 토하지 않고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섹"피정센타는 고요하고 아름다운 해안가에 위치해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평화가 느껴지는 곳이었습니다. 이 신부님께서는 거기서도 어김없이 저희를 기다리셨고, 턱수염 김 신부님은 옛 신자들과 못다 나눈 정이 아쉬워 밤길을 마다않고 그 먼 할로파 본당으로 다시 가셨습니다. 또 할로파 본당의 김일영 신부님은 피정지도차 저희와 합류하시고. 우리는 장호창 신부님이 치시는 기타 반주에 맞춰 남태평양의 여름밤이 깊어지는 줄도 모르고 밤늦도록 노래에 정취에 취했습니다. 이튿날 세 분 신부님이 함께 미사를 집전하시는데 깨진 창틈으로 제비 한 마리가 날라 들어와 성전을 대여섯 바퀴 돌더니 중앙의 예수님 십자가상 위에 살포시 앉았다가 날아가는 모습이 정겨웠습니다. 그러나 예쁘게 꽃을 장식한 제대 앞 꽃병은 태평양 전쟁 때 쓰였던 박격포 탄피였고, 아직도 녹슨 탱크 잔해며 포신 등 전쟁의 상흔이 여기저기 남아있었습니다. 오늘은 피그섬으로 소풍가는 날. 미사 후 실습 나온 학사님 세 분도 함께 배를 타고 출발했습니다. 30분 후 도착한 돼지 모양의 피그섬. 그림같이 아름다운 천혜의 해수욕장이었습니다. 모처럼 동심으로 돌아가 수영도 하고, 신부님과 학사님들이 숯불에 구워 만든 바베큐에 쌈장을 찍어 야채에 싸먹던 맛은 아마 오래토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여기가 천국이다!”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세상 근심 걱정이 모두 사라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사이사이 신부님이나 학사님들과 격의 없이 편하게 나누는 대화 한마디 한마디는 곧 강론이요, 피정이었습니다. 그렇게 즐겁게 여드레 날을 보냈습니다. 이제 마당 교구에 머무르는 끝 날입니다. 이번에는 이 신부님이 직접 사목하시는 시시악본당 방문 차례입니다. 본당 주변은 해일이 모든 것을 앗아가 더 이상 살 수가 없어 이주한 난민들이나 타운에서 머물 곳이 없어 강제로 쫓겨난 빈민들이나 부랑민들이 모여 사는 우범지대 같은 곳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좀도둑도 많고 심지어는 환각제를 복용하고 강도로 돌변한 사람들이 가끔 쳐들어와 성당 건물이 성한 데가 없다고도 하셨죠. 오죽하면 주교님이 사제관을 폐쇄하고 시내에서 출퇴근 하라고 명령하셨겠어요. 이태리나 폴란드에서 오신 신부님들도 여러번 봉변을 당하셨다구요. 그런 곳을 이 신부님은 벌써 2년째나 사목하신다니... 참 배짱도 좋으시네요. 무슨 빽이시죠! 뭘 믿고 그렇게 불안한 곳에서 활보하시죠? 저 같은 사람은 걱정을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더군요. 물론 신부님이야 다르시겠지만 그래도 조심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런 곳인데도 그날 저희들을 맞이하는 원주민 교우들의 환영은 다른 어느 곳 못지않게 뜨겁고 열렬하였습니다. 조금도 이상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미사 때 전통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입당할 때와 또한 전통춤을 추며 성서를 봉헌하고 성합, 성작을 봉헌하는 모습은 대단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침 학생 미사라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백여 명의 어린 학생들과 뒷자리의 어른들, 자리가 모자라 밖에서 미사를 드리는 신자들 모두가 신부님의 말씀 한 마디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귀를 쫑긋 세우고 열심히 듣더군요. 신부님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대단해 보였습니다. 미사가 끝난 후, 제 옆에 젊은 원주민 엄마가 귀여운 아기를 안고 있길래 그 동안 익힌 현지어로 능숙하게 “굿 벨라 까이까이”했더니 그 엄마가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더군요. “굿 벨라 삐기니니”(예쁜 아이구나) 해야 할 것을 “굿 벨라 까이까이”(너 맛있는 음식이구나) 했으니 아이 엄마가 놀랠 수 밖에요. 나중에 얘기들은 사람들도 배꼽을 잡았죠. 우리가 처음 도착하는 날, 마당 공항에 나와 뜨거운 태양아래 열렬히 환영했던 분들도 그 분들이라구요. 다시 한 번 지면을 통해 그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드디어 파푸아 뉴기니아의 마지막 밤. 타임머신을 타고 아득한 옛날 아득한 딴 세상에 갔다가 현실로 돌아오는 밤 같았습니다. 그 동안 함께하신 세 본당의 세 신부님과 마침 오늘 낮에 미국에서 1년간 어학연수를 마치고 도착, 새롭게 이곳에서 둥지를 트실 여리디 여린 초임의 김대영 신부님, 그리고 인솔하신 김 신부님과 이 곳 지구를 이끌고 계신 이동윤 신부님, 우리가 머무는 동안 묵묵히 온갖 뒷바라지를 다해주신 학사님 다섯 분 등 모두가 신부님이 거주하시는 지구 사제관에 모였었죠. 이 신부님께서는 오늘이 마지막 방문 날이라고 정성을 다해 만찬을 준비하셨고, 꽁지머리 학사님은 처음 보는 악어고기와 먼 바다에서 잡아 온 큰 바닷가재를 익숙한 솜씨로 연신 구워내셨습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돌아가며 한사람씩 소감을 발표하는데, 참석하신 모든 분들이 하나같이 서로에게 감동받는 아름다운 밤이었습니다. 마침내 석별의 정을 나누어야 할 이른 아침의 마당공항. 이 신부님을 비롯한 모든 신부님들이 나오셔서 한분한분 정겹게 인사를 나누셨습니다. 무언가 드릴 말씀이 많은 것 같았는데 정작 말씀이 떠오르질 않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하는 말 밖에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그렇게 싱겁게 신부님과 악수하고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포트 모르스비 공항에 도착해 카리타스 김 수녀님의 도움을 받아 그 날 오후 3시 반 비행기를 타고 싱가폴을 거쳐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신부님과의 열흘간의 긴 여정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동안 또 한 주가 지나 이제는 한달 가까이 돼갑니다. 추석 명절도 지났고요. 그런데도 아직도 그 곳 정경이 눈에 선합니다. 색 바랜 티셔츠에 반바지, 슬리퍼 차림의 이 신부님을 비롯해서 사제관 양철지붕 위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받아 마시는 세 신부님들, 실습차 나와 말라리아와 싸워가며 힘들지만 즐겁게 사시는 여러 학사님들... 신앙의 힘이 아니면, 하느님의 사랑이 아니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지금 그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나라 국력 신장의 상징일지도 모르죠. 외방 선교회 신부님들 말씀마따나, 해방 후 우리 민족이 6・25를 겪으면서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에 우리도 해외 선교사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까 이제는 우리도 이웃과 나누어야 할 때라고 말씀하시는 데에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저도 6・25 때 다섯 살이었고, 동네 교회에서 나누어 주는 노란 강냉이 죽도 많이 얻어먹었거든요. 그러니 당연히 갚아야 한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런데 그런데도 말씀예요. 왠지 거기 계신 신부님들이 훌륭하시고, 존경스럽기도 하지만 또한 많이 안쓰럽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아마 너무 덥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사시기 때문일 거예요. 게다가 오십리 백리 떨어진 공소 여러 곳을 찻길이 없어 열흘이고 스무날이고 걸어서 다니셔야 한다니 얼마나 고생이 심하시겠어요. 신부님들 아니시면 상상도 못할 일 이지요. 정말 온갖 고난과 역경을 헤치시며 선교하시는 신부님들의 삶에 경의를 표합니다. 끝으로 존경하는 이동윤 신부님과 파푸아 뉴기니아의 모든 우리 신부님, 학사님들, 카리타스 수녀님들. 그리고 저희를 인솔해주신 김 신부님, 그 동안 자상한 보살핌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저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이번 선교지 체험여행에서 체험한 진한 감동을 평생 가슴에 담아 한국 외방 선교회의 작은 밀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또한 이번 뜻있는 여행을 안전하게 지켜주신 하느님의 은총에 두 손 모아 감사드리며, 혹 내용 중 결례되는 부분이 있었다면 너그러이 용서하십시오. 항상 말라리아에 조심하시고, 주님 안에 평화를 빕니다. 2005년 9월 말 서울 성내동 본당 김종관(율리아노) 올림 <저작권자 ⓒ FPN(소방방재신문사ㆍ119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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