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광고

남극 일 년 살기- VII

광고
경기 파주소방서 김성한 | 기사입력 2024/10/02 [10:00]

남극 일 년 살기- VII

경기 파주소방서 김성한 | 입력 : 2024/10/02 [10:00]

▲ 태양이 저물다

 

태양이 저물었다

태양이 지평선에 머무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더니 일출 전, 일몰 후에 빛이 남아있는 시민박명(市民薄明) 상태로 바뀌면서 더는 해를 볼 수 없게 됐다. 이제 본격적인 남극의 극야기간이 시작됐다. 보통 극야기간은 5월 초부터 8월 중순까지 지속된다.

 

이 시기가 시작되면 자연스럽게 야외활동 시간은 줄어들게 된다. 단순히 어둠이 짙어질 뿐 아니라 혹한과 강풍이 자주 불며 남극의 변화무쌍한 날씨를 제대로 보여준다. 우선 밤이 짙어지면서 밤하늘에 수많은 별을 볼 수 있게 된다.

 

▲ 남극하늘 은하수

 

모두들 한적한 숲속으로 캠핑가서 바라보는 밤하늘의 별들이 선명하고 아름답다고 극찬한다. 하지만 남극에서의 극야 기간에 보이는 수많은 은하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안전대원인 나는 변화무쌍한 날씨가 동반된 극야기간이 시작되면서 더욱 긴장하며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악조건의 기상 상황에서 화재나 안전사고가 발생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이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사고에 신속하게 대처하려고 항상 무전기를 휴대하고 지냈다. 심지어 잘 때도 무전을 켜놨다.

 

일과시간 이후에도 항상 무전기를 휴대한 덕에 초기엔 “어제도 당직인 것 같은데 오늘도 당직이냐”고 묻는 대원들이 있었다. 물론 나중엔 안전대원은 그냥 항상 무전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으로 인식됐다.

 

▲ 극야기간의 기지 모습

 

새벽에 무전기로 다급한 음성이 들렸다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었는데 갑자기 무전기에서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지금 무전을 듣는 대원들은 통신실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통신실로 향했다. 이번엔 무전이 아닌 방송 장비가 켜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 나도 단단히 났구나’

 

긴장하며 귀 기울인 채 통신실로 향했다. 

 

“지금 오로라가 터졌습니다. 

오로라를 보실 분들은 통신실로 와서 관측 바랍니다”

 

▲ 오로라

 

당직근무를 서던 대원은 오로라를 보고 아직 자지 않는 대원들에게 오로라를 보라고 첫 무전을 했다. 그사이 더 커진 오로라가 찬란하고 역동적인 춤사위를 선보이자 흥분해 방송까지 하며 자던 대원들을 깨운 것이다.

 

이전에도 오로라가 관찰된 적이 있는데 희미하고 작아 크게 이슈가 되진 못했다. 그러나 이날은 달랐다. 덕분에 대부분 대원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기지에서 가장 높은 통신실로 올랐고 다 함께 오로라를 관찰했다. 외부 온도가 영하 30℃ 가까이 됐지만 추위를 이겨가며 한참 동안 하늘을 바라봤다.

 

▲ 오로라를 촬영 중인 대원

 

모두 카메라로 오로라가 춤추는 남극의 밤하늘 절경을 담기에 여념이 없었다. 일부 대원은 한국의 가족과 영상통화를 하며 오로라를 보여주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로라의 화려함이 영상으로는 잘 담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처음으로 화려한 오로라를 한참 동안 지켜봤다. 40분가량이 지나자 꺼져가는 불씨처럼 오로라가 사그라들자 하나둘 다시 따뜻한 침대의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누웠는데도 오로라의 여운은 사라지지 않고 한참 동안 계속됐다.

 

그날 이후 극야기간 오로라가 계속해서 보였다. 어느 순간 더는 새벽잠을 깨고 이불 밖으로 우리를 불러내는 오로라가 아니었다.

 

우주과학대원이 “오늘 오로라는 정말 대박”이라며 예보해주고 새벽에 무전을 해줘도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심지어 조회시간에 “야간엔 불필요한 무전을 하지 말라”는 핀잔까지 듣게 됐다. 

 

그렇게 오로라 대소동은 막을 내렸다. 수많은 사람이 오로라를 보기 위해 큰 비용을 들여 캐나다, 북유럽의 핀란드 같은 나라로 관광을 간다. 그렇게 간 여행지에서도 운이 좋아야 오로라를 볼 수 있다. 우리에게는 일상이 돼버린 이 현실이 신기하기만 했다.

 

김치가 없어졌다

극야가 시작되면서 변화무쌍한 날씨는 여러 가지 예상치 못한 일을 만든다. 그중 하나가 바로 ‘블리자드’다. 기온이 영하 30℃를 오르내리면서 풍속 20~30㎧를 넘는 블리자드가 발생하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밤새 바람 소리에 잠을 설치기도, 기지가 흔들리는 걸 느끼기도 할 정도로 강한 바람이 하루 이상 계속됐다.

 

그렇게 블리자드가 한번 지나고 나면 연구 장비나 각종 시설물 상태를 점검해야 한다. 바람에 취약한 시설물들이 파손되는 일이 흔했기 때문이다. 두꺼운 철문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블리자드의 위력은 대단했다.

 

▲ 블리자드 후 시설 점검

 

▲ (왼쪽부터)블리자드 후 연구장비 보수, 블리자드로 컨테이너 출입구에 쌓인 눈 제설

 

블리자드 이후 외부점검을 마치고 돌아와 저녁 식사를 기다리는데 

 

“김치가 없어졌어요”

 

조리대원이 외쳤다. 알고 보니 조리대원이 본관동 외부 계단에 쌓아 놓은 김치박스가 바람에 모두 날아가 버린 상황이었다. 한국인에게 김치가 없다는 건 상상조차 안 돼서 모두가 이 사건에 주목했다. 그렇게 구박하던 냉동 김치지만 그마저도 없다면 안 될 일이었다.

 

▲ 바람에 날아간 김치박스

▲ 김치박스 정리

 

대원들은 모두 김치를 찾아 나섰다. 다행히 멀리 날아가진 않아 기지 주변에 흩어진 김치박스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모든 대원이 밖으로 나가 김치박스를 모아 왔다. 바람의 영향을 받지 않은 다른 계단참으로 김치박스들을 옮긴 후 김치 실종 소동은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런데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니 중장비 대원이 김치박스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김 대원, 김치박스 중에 원장님(의료대원) 이름 써진 거 못 봤어?”

“그게 무슨 김치예요?”

“냉동 김치를 그냥 녹여서 김치찌개를 끓이면 맛이 없어서 특별하게 숙성시킨 김치를 따로 빼놨어”

“아니, 이 많은 김치박스에서 그걸 어떻게 찾아요. 그냥 다시 한 박스 숙성시키세요”

“내일모레 당장 주말인데 그때 먹을 김치가 없어”

 

그는 계속해서 김치박스를 들었다 놨다 하며 찾았다.

 

▲ 중장비 대원의 김치를 찾아라!

 

“형님, 그런데 왜 원장님 이름을 김치박스에 써놨어요?”

“원장님 이름을 써놓으면 아무도 손대지 않을 거 아냐”

 

원장님이 18명의 월동 대원 중 대장님보다도 나이가 많고 하니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결국 없어진 김치를 일부 대원과 함께 비교적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이틀 후 토요일 중장비대원은 방에서 늦잠을 자던 내게 찾아왔다. 

 

“김 대원, 아침 먹어. 내가 김치찌개 맛있게 끓여놨어”

 

곧 환갑을 바라보는 중장비 대원이 해맑은 모습으로 미소지으며 식당으로 이끌었다. 

 

그날 이후 중장비 대원은 함께 김치를 찾아준 보답으로 쉬는 날마다 김치찌개 멤버로 불러줬다. 덕분에 매주 주말 중 한 끼 이상은 김치찌개로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다.

 

남극에서 생방송으로 TV를 볼 수 있다, 없다?

최근 막을 내린 파리올림픽 개막식 시청률이 낮다는 뉴스를 접했다. 요즘 사람들이 과거만큼 올림픽에 관심을 두지 않을뿐더러 TV 방송 프로그램을 실시간으로 시청하는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유튜브나 OTT 서비스를 통해 내가 원할 때 언제든지 보고 싶은 영상을 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기 때문이다. 그나마 유튜브나 OTT 서비스에 의존하지 않는 분야가 스포츠라는 설명도 있었다. 사실 스포츠 경기의 결과를 알고 나면 흥미가 많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장보고 과학기지의 인터넷은 인공위성을 활용한다. 그렇다면 남극에서는 생방송으로 스포츠 관람이 가능할까? 우리가 남극에 머물렀던 2023년은 6월엔 U-20 월드컵 토너먼트 경기, 8월엔 아시안게임 축구경기가 진행되던 시기였다.

 

이때 우리에겐 축구경기를 보고 싶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다. 대장님 승인하에 통신대원 주도로 필수 통신설비를 제외한 모든 인터넷 연결을 끊었다. 스포츠를 중계해 주는 포털사이트에 접속해 축구경기를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 축구경기 시청

 

식당에 모두 모였다. ‘과연 끊김 없이 축구경기를 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고 스크린으로 시선을 보냈다. 결과는 매우 순조로웠다. 화면 멈춤 현상도 없고 화질도 나쁘지 않았다. 심판의 휘슬 소리와 함께 축구경기가 시작됐다. 

 

20분 정도 지났을까? 화면이 멈추더니 끊겨버렸다. 재접속을 했는데 전반 10분부터 영상이 나왔다. 다른 대원이 20분 이후부터 보게 하려고 영상에 보이는 스크롤 바를 당겼다. 그러자 다시 화면이 멈췄고 더는 경기를 볼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그 대원에게 야유를 보내는 이도 있었다. 

 

▲ 축구경기 시청 중 화면 정지

 

그렇게 여러 번 접속을 시도한 끝에 다시 전반 10분부터 시작되는 경기를 볼 수 있었다. 대충 시간을 계산해보니 전반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래도 다시 화면이 멈출까 봐 손댈 수가 없었다.

 

결국 이미 한국에서 8강 진출 확정 소식을 접했을 시간에 우리만의 축구경기를 이어 보며 늦게나마 대한민국의 8강 진출을 기뻐했다.

 

8월 아시안게임 축구경기 날에는 야간 당직근무를 섰다. 본관동 식당에서 경기를 상영했지만 볼 수 없었다. 그런 나를 위해 축구경기 시간에는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내 컴퓨터는 인터넷 접속을 제한하지 않았다.

 

덕분에 혼자 인터넷을 독점할 수 있어서 유튜브 시청을 시도했다. 다른 인터넷망이 차단돼 평소와는 다르게 끊김 없이 좋은 화질로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오랜만에 접한 유튜브 세상에 빠져들었다. 그러던 중 사무실 전화벨이 울렸다.

 

“안전대원님, 지금 유튜브 보시는 거 아니죠?”

 

시계를 보니 이미 축구경기가 시작된 후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 전화를 받은 후부터는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경기 내내 화면은 멈추거나 끊기는 증상이 계속됐다고 한다. 내가 인터넷을 하지 않았던 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다음 날 아침 당직근무를 교대해 주러 온 총무대원이 “욕을 하도 먹어서 배부르지 않아요?”라며 지난 밤 일부 젊은 대원이 화면이 끊길 때마다 “안전대원님, 또 유튜브 보는 거 아니야?”라며 내 탓을 했다는 말을 전해줬다. 처음에 유튜브를 본 건 맞지만 이후엔 인터넷 접속조차 하지 않았어서 조금은 억울했다.

 

결과적으로 남극에서 생방송으로 TV를 볼 수 있다, 없다?의 정답은 “남극에서 생방송으로 TV를 볼 순 있다. 하지만 온전히 보기는 어렵다”이다.

 

 

경기 파주소방서_ 김성한 : sunghan21@gg.go.kr 

 

<본 내용은 소방 조직의 소통과 발전을 위해 베테랑 소방관 등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 2019년 5월 창간한 신개념 소방전문 월간 매거진 ‘119플러스’ 2024년 10월 호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남극 일 년 살기 관련기사목록
광고
INTERVIEW
[INTERVIEW] 소방관 옷 벗고 정치인 길 걷는 윤성근 경기도의원
1/4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