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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로 튄 소방관의 퇴직 인생-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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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병원 PMC 유기운 | 기사입력 2025/07/02 [10:00]

아프리카로 튄 소방관의 퇴직 인생-Ⅲ

서울대병원 PMC 유기운 | 입력 : 2025/07/02 [10:00]

03. 큐리 병원 구급대원 교육, 맨땅에 헤딩은 계속된다

 

“이 사람들 Patient Carrier입니다!” 

 

큐리 병원 원장 닥터 비땅(Bitang)에게 구급대원 교육을 보고하러 갔을 때 그의 첫 마디였다. 그가 표정으로 덧붙였다. 

 

“환자 운반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교육이 왜 필요하죠?” 

 

선뜻 원장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구급대원이 환자 처치를 할 수 있어야지요? 이송만 하면 안 되지 않나요?” 

 

원장의 마뜩잖은 표정과 교육 사전 모임에서 소극적이던 대원들의 태도가 겹치면서 불안감이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이때는 몰랐다. 무심히 넘긴 불안의 그림자는 빙산의 작은 조각일 뿐이었다. 한 달, 두 달, 카메룬 생활 짬밥이 쌓이면서 그림자에 가려진 숨겨졌던 실체를 부분일망정 하나, 하나씩 알게 됐다. 

 

사실 병원 전 응급의료체계는 크고 작은 톱니바퀴가 맞물려 굴러가야 작동하는 시스템이다. 카메룬이라는 전혀 새로운 환경에서 빠진 톱니바퀴는 새로 만들고, 부서진 톱니는 고쳐 전체 구성 요소가 하나의 시스템으로 작동하도록 하는 작업이 바로 카메룬 병원 전 응급의료 구축 프로젝트였다. 

 

구급대원도 그 톱니 중 하나를 이룬다. 맨발의 카메룬 초짜 매니저가 넘어야 할 첫 번째 의무이자 치러야 할 대가 중 하나가 카메룬 현실에 두 발을 딛고 프로젝트를 파악하는 일이다. 여전히 맨발이었지만 그 의무에 따른 대가를 치를 각오를 다시 다졌다. 

 

▲ 교육 오리엔테이션

 

▲ 큐리 사뮤 구급대 1차 교육

 

서른 명 남짓한 큐리 구급대는 지도 의사와 간호사, 간호조무사 각 한 명씩에 대부분 환자 이송 대원과 구급차 운전사로 구성된다. 교육 시작 전부터 큐리 구급대원들의 기초 지식이 부족하다는 점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첫 번째 수업에서 코이카와 서울대병원이 추진하는 카메룬 응급의료체계 구축 사업이 무엇인지, 병원 전 응급의료체계에서 구급대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면서 ‘Patient Carrier’란 말을 쓰지 말라고 힘줘 말했다. 

 

진심으로 그들이 환자 옮기는 사람으로만 머물지 않길 바란다. 하지만 사뮤(SAMU) 구급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큐리 구급 동료들의 의료 지식과 응급의료 시스템에 대한 이해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그들은 맥박을 측정하지 못했고 바이털 사인(Vital Sign)이라는 용어도 몰랐다. 무엇보다 구급대원 교육이 뿌리를 내리는 게 중요했다. 오가다 동료들을 만나거나 수업 때마다 Training Meeting은 일회성이 아니라 2주 수요일마다 당연히 열리는 교육임을 인식시키려고 노력했다.

 

교육 전략은 단순하게 잡았다. 큐리 구급대원들의 현재 수준에 적합한 주제를 계속 반복하되 같은 주제를 다양한 관점으로 접근하면서 수준을 높여갔다. 1회 교육부터 응급의료체계, 현장 안전, 환자 평가(의식 확인ㆍ기도유지, ABC, 바이털 사인)를 심정지, 당뇨 환자 평가 등 관점을 바꿔가며 반복했다.

 

큐리 병원 실제 환자 사례를 교육 내용과 접목해 현실감과 교육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교육 PPT를 만드는 데도 공을 들였다.

 

▲ 2차 교육 PPT

 

수업은 내가 영어로 말하면 불어 통역을 거쳤다. 카메룬은 토착어만 해도 250개가 넘는다. 공식 언어는 프랑스어와 영어인데 그 이유가 식민이 낳은 유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카메룬 사람 중에는 불어와 영어, 현지어까지 8개 언어를 할 줄 안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언어 천재 아니냐는 말에 카메룬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는다. 카메룬 수도 야운데는 불어 권역으로 내 구급 동료 대부분은 공식 언어로 불어를 했고 나는 불어 초보였다. 

 

이렇게 수업엔 언어 장벽이 존재했다. 그래서 교육 PPT에 강의 내용 설명 못지않게 그에 적합한 교육 사진과 동영상을 찾는 데 공을 들였다. PPT 내용은 주로 브래디(Brady)와 모스비(Mosby) 출판사 파라메딕 텍스트북(Paramedic Textbook)을 참고해서 채웠다. 

 

올해 11월 3차 출장 때 구급대원 역량 강화 교육이 예정됐다. 그때까지 큐리 동료들에게 교육에 참여할 의욕과 동기를 불어넣고 그들이 전문 교육을 받는 데 필요한 기초 실력을 쌓는다면 첫해 뿌리 농사는 성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맙게도 “언제 교육이 있냐”고 묻거나 교육 중에 슬라이드와 동영상을 찍는 동료가 점점 늘었다. 매번 교육에 구급대원과 병원 직원이 20명 남짓 모이면서 석 달이 지났고 그사이 계절이 바뀌었다.

 

우리나라처럼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아니지만 카메룬에도 건기와 우기, 우기도 비가 적게 내리는 시기와 많이 내리는 계절이 있었다. 

 

3월부터 가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건기가 끝났다. 짧지만 굵게 내리는 비에 잠시나마 더위의 기세가 꺾이고 대기의 오염물질이 씻겨가면서 훨씬 살만해졌다.

 

카메룬의 반가운 빗줄기를 타고 프로젝트 2차 전문가 출장이 예정된 4월이 다가왔다. 어느덧 카메룬 야운데 생활이 5개월 차가 되니 출장팀을 위한 사전 준비를 1차 출장 때보다 훨씬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2차 전문가 출장에 맞춰 미리 의사와 간호사 대상 사전 교육 측정 설문을 배포하고 모으는 일을 해야 했다. 설문지 복사는 야운데대학 캠퍼스 안에 있는 복사집에서 했다. 복사비가 싼 장점도 있거니와 대학을 둘러보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다.

 

야운데대학 학생들과 대화도 해보고 싶었다. 야운데대학 캠퍼스는 컸지만 카메룬처럼 캠퍼스도 가난해 보였다. 대학 교정 한쪽에 가게와 식당, 복사집이 모여있었다. 가게는 어릴 적 구멍가게를 닮았고 복사집은 대학 시절 복사집보다 허름했다. 

 

누추한 캠퍼스지만 복사기기 한편에 놓인 ‘물리수학’ 불어 복사물은 카메룬 젊은 지성들이 공부하는 곳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짧은 대화를 통해 그 젊은 지성들이 좋아졌고 그들이 처한 현실이 안타까웠다. 물질적 궁핍만이 아닌 카메룬의 현실이 더 서글펐다.

 

▲ 야운데대학 캠퍼스 복사집

 

▲ 의공기사 로무스 씨와 소주

 

사실 야운데대학이 처음은 아니었다. 카메룬 응급의료체계 구축 프로젝트 의료기기 담당 서경 선생님과 각별한 인연이 있는 현지 전문가 로무스(Romus) 씨 여동생 졸업식에 간 적이 있었다.

 

교민이 운영하는 한국식 카페 ‘다방’에서 처음 만난 그에게 음료를 권하자 소주를 시켜 소주잔으로 나온 막걸리 그릇에 소주를 들이켰다. 

 

“제 동생이 야운데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거예요”

“졸업식에 축하하러 가도 돼요?”

 

로무스 씨와 좋은 관계를 맺고 싶었다.

우리나라 학위 수여 졸업식을 생각하고 참석했는데 적잖이 당황했다. 눈앞에는 우리나라로 치면 박사 논문 심사 최종 발표장이 펼쳐졌다. 방송국에서 촬영도 나왔다. 그저 모든 광경이 신기하기만 했다.

 

선풍기도 없는 강당에서 몇 시간 동안 다섯 명의 심사위원과 박사 예정자가 벌이는 말라리아 관련 논문 불어 토론을 들었다.

 

▲ 야운데대학 박사 논문 심사 최종 발표와 방송국 취재

 

▲ 야운데대학 박사 논문 심사 최종 발표와 방송국 취재

 

‘로무스 씨가 분명 졸업식이라고 했는데…’ 

 

학생들 가운데 앉아 나가지도 못하고 빨리 논문 심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심사가 끝나고 여동생을 인터뷰하는 방송국 촬영팀을 가리키며 로무스 씨는 “여동생에게 주는 박사 취득 선물”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는 자랑스러움과 뿌듯함이 가득했다. 

 

‘카메룬에서는 야운데대 박사학위 수여도 뉴스거리가 되는구나’ 싶어 ‘선물’이라는 로무스 씨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메룬에서는 논문 발표와 심사를 마치고 바로 학위를 수여하는데 방송국에 돈을 내면 방송에 내보내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 일을 계기로 각기 다른 문화와 시스템을 가진 사람끼리 상호 신뢰가 없다면 오해와 불신이 쉽게 싹틀 수 있다는 점을 배웠다. 국제 원조사업에 참여하는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일이다. 로무스 씨와는 지금도 좋은 친구이자 파트너로 잘 지내고 있다.

 

이번 2차 출장은 큐리 병원 의료인 역량 강화 교육이 1차 목표였다. 문성우, 김민우 교수, 이가람 간호사 선생께서 의사, 간호사 교육을 맡았다. 신상도, 정중식 교수께서 병원 경영, 서경 전문가, 강동성, 주윤하 박사께서 장비 유지관리팀 교육과 큐리 병원 내 인터넷망 구축을 준비해 오셨다.

 

▲ 큐리 의사, 간호사 역량 강화 교육

 

▲ 전문심장구조술(ACLS) 조별 실습

 

1차 출장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전문가분들은 일요일에 도착해 월요일부터 강행군했다. 큐리에는 강의 공간도, 실습 기자재도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도 이론 교육과 실습, 시나리오 기반 1:1 평가 등 교육과정이 착착 진행됐다. 

 

개인적으로 모든 교육에 참석하고 싶었지만 여러 미팅과 일정이 겹쳐 그럴 수 없어 아쉬웠다. 그래도 틈틈이 병원 경영 교육이나 몇몇 의사, 간호사 교육에 참여할 수 있었다. 실습 여건 부족으로 ‘전문’이라는 말을 붙이긴 그렇지만 심장구조술 실습이 인상 깊었다.

 

열악한 여건에서 실습에 열의를 다하는 큐리 의료진은 지난 119구급대원 시절을 떠올리게 하면서 깊은 울림을 줬다. 새삼 프로젝트 현지 전문가로서 책임감에 어깨가 무거워졌다.

 

▲ 큐리 병원 고위직 대상 병원 경영 교육

 

▲ 보건부 DAJC(법률ㆍ소송 담당국) 회의

 

이번에도 카메룬 정부 기관이나 WHO, CDC, 야운데 의대 방문 일정과 핵심 인사(Key Person) 면담은 코이카 김상철 소장과 서주희 부소장께서 전담해 주셔서 큰 힘이 됐다. 4월 말에 의료 장비 현지 시장 조사까지 끝나고 2차 출장이 마무리됐다.

 

출장 기간 중 큐리 사뮤 구급대 교육을 하지 못했다. 5월로 넘길까 하다 너무 늘어지면 안 될 것 같아 서둘러 7차 교육을 추진했다. 4월 30일 교육에 지금까지의 교육 중 가장 적은 인원이 참여했다.

 

교육 공고 기간이 짧았던데다 교육 시작 1시간 전부터 폭우가 내렸던 이유가 컸다. 비가 내리면 비번인 직원들이 택시 잡기도 힘들고 더 비싼 값에 택시를 타야 한다. 택시비가 없다는 대원들의 말을 들으며 전부터 머리를 맴돌던 변화를 앞당겨야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유기운

서울에서 생계형 소방관으로 30년 근무했다. 현재 소방관 인생을 마무리하고 갑자기 아프리카로 튀어 카메룬 야운데에서 코이카 병원 전 응급의료체계(EMSS) 구축 프로젝트 현지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서울대병원 PMC_ 유기운 : waterfire119@naver.com

 

<본 내용은 소방 조직의 소통과 발전을 위해 베테랑 소방관 등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 2019년 5월 창간한 신개념 소방전문 월간 매거진 ‘119플러스’ 2025년 7월 호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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