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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골목길과 소화전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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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소방학교 박지수 | 기사입력 2022/12/20 [10:00]

서울 골목길과 소화전에 대한 단상

서울소방학교 박지수 | 입력 : 2022/12/20 [10:00]

첫 임용지에서 구급차를 운전하며 차량진입이 만만치 않은 골목길을 많이 접했다.

 

화재 출동 때 펌프차와 함께 골목길로 출동하거나 차량통행이 어려운 골목에서 불시 출동 훈련으로 100m 가까운 거리를 호스 전개하는 걸 볼 때면 이런 곳에서 발생하는 사고의 골든타임을 지켜내는 게 정말이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골목길과 그 주변에 빼곡하게 자리 잡은 집들에 대한 의문이 오늘까지 이어져 이번 글을 쓰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서울의 골목길은 어떻게 형성됐을까. 이에 대한 힌트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얻을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사설 상수도 소화전

▲ [그림 1] 오래된 소화전(연도 미상)

 

용산소방서 구급차 운전원에서 소방용수 담당으로 옮겼을 때의 일이다. 반기별로 진행하는 상수도 소화 용수설비 전수 조사 기간이 좀 지나 한 직원에게 제보가 왔다.

 

“이태원에서 일제강점기 때 쓰던 옥외소화전 2개를 발견했는데 확인 한 번 해줘”

 

제보받은 주소는 해외공관이 많이 모인 언덕길이었다. 경사가 급한 골목이었는데 정말로 한눈에 봐도 오래된 옥외소화전이 있었다.

 

용산에서는 도롯가에서도 심심찮게 오래된 옥외소화전을 만날 수 있었지만 이번엔 정말 처음 보는 소화전이었다. 소화전 세글자가 한자로 새겨져 있었고 상수도와의 연결이 끊긴 지는 상당히 오래된 것처럼 보였다.

 

소화전 위쪽을 자세히 보면 스핀들 쪽 마개가 분실돼 움푹 팬 공간이 있는데 지역 주민의 재떨이로 사용되고 있었다. 

 

처음엔 정말 일제강점기에 쓰이던 건지 연도를 추정하기가 쉽지 않아 서울시 중부수도사업소에 전화로 사정을 설명하고 사진을 보내 문의했는데 큰 성과는 얻지 못했다. 당시 중부수도사업소에서 가장 오래 근무하신 분도 처음 보는 소화전이라고 했다.

 

일제강점기 소방활동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니 다음과 같은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소방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재정적인 측면과 함께 물, 즉 소방용수가 반드시 필요하였다. 이에 따라 소방전용의 ‘소화전’이 소방조와 함께 등장하였고 위급 상황 시 소방활동에 신속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상비 설치하였다. (중략) 즉 당시 수도와 방화전은 일본인 거주지 위주로 설치되어 그 혜택이 제공되었다.

 

1910년을 기점으로 볼 때 용산은 경성부에 거주하는 일본인 인구의 30%에 해당하는 1만638명이 거주하던 전형적인 일본인 주거지였다. 1930년대 후반에 일본인 상류층 주거지는 신당정(신당)과 동사 헌정(장충동 1가), 남대문 밖 삼판통(후암동)에서 강기정(갈월동), 죽청정(충정로)까지 확장되기에 이르렀다.

 

한성부는 1903년 하야시다(林田)와 사카모토(坂本) 등이 거류민단의 허가 하에 사설 수도를 설치했고 그 배수지는 일본인 구락부 근처의 땅이었다.

 

이를 통해 소화전도 상수도와 함께 유사한 위치에 설치됐을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 한성부의 사설 상수도 설치 위치도 일본인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논문 리서치를 통해 용산이 일본인의 대표적인 거주지였다는 점에서 사설 상수도의 설치와 함께 소화전이 설치됐을 수도 있다는 추론으로 당시 궁금증을 마무리 지었다.

 

실개천과 골목길

서울의 골목길 모습에서 일제강점기 상수도 소화전까지 오게 된 이유는 도시와 물의 관계 때문이다. 물은 도시의 크기를 규정하는 여러 가지 중에서도 가장 일차적인 요소다. 사람들에게 먹고 씻을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없는 곳에는 결코 대도시가 만들어질 수 없다.

 

상수도가 없었다면 로마도 없었다. 로마와는 다르게 운 좋게도 서울을 비롯해 한반도에 만들어진 중세 이전의 대도시들은 다행히 별도의 상수도 시설이 필요하지 않았다. 국토 어디에서나 맑은 물을 충분히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화강암반 위로 흐르는 물이나 그 아래 지층을 흐르는 지하수는 석회암이나 그 밖의 바위 사이로 흐르는 물보다 맑고 깨끗하다.

 

화강암반으로 구성된 한반도 땅에서 살아온 선조들은 맑은 물을 풍부히 쓸 수 있었다. 더욱이 화강암 돌산들로 에워싸인 중세 서울 도처에는 우물이 있었다. 조선 수립 초기 태종은 서울로 다시 천도를 단행한 직후 다섯 집에 한 곳씩 우물을 파도록 했다.

 

이 지시가 그대로 이행됐다면 재천도 직후라는 시점을 고려해도 서울에는 2천~3천개의 우물이 있었을 거다. 집 안마당 한 귀퉁이에 우물을 만드는 권세가들도 적지 않았다. 서울의 우물은 로마의 상수도보다 나은 우수한 품질의 상수를 공급해줬다.

 

오랫동안 서울은 우물의 도시였다. 20세기에 들어와 우물 사용자의 비중은 급격히 줄었지만 그래도 1950년대까지 새로 만들어지는 우물이 많았다.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의 상수도 보급률은 22%에 불과했다.

 

따라서 이런 상하수도 인프라가 구축되기 전 주거는 한강의 지류 하천을 따라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실개천 주변으로 주거들이 들어서게 되고 그 옆으로 사람과 말들이 지나다니면서 자연 발생적으로 도로가 만들어지게 됐다.

 

자연히 굽은 실개천 주변으로 형성된 주거형태가 지금 골목길의 원형으로 자리 잡았다. 서울은 수변 공간 주변으로 빨래도 하고 상하수도 시설로 사용하는 커뮤니티가 자연스럽게 형성됐다고 볼 수 있다. 소설가 박태원의 천변풍경을 보면 당시 천변을 중심으로 한 커뮤니티를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간간히 부는 천변 바람이 제법 쌀쌀하기는 하다.

그래도 이곳, 빨래터에는, 대낮에 볕도 잘 들어,

물속에 잠근 빨래꾼들의 손도 과히들 시립지는 않은 모양이다.

 

“아아니, 요새, 웬 비웃(청어)이 그리 비싸우?”

 

주근깨 투성이 얼굴에, 눈, 코, 입이,

그의 몸매나 한가지로 모두 조그맣게 생긴 이쁜이 어머니가,

왜목 욧잇을 물에 흔들며, 옆에 앉은 빨래꾼들을 둘러보았다.

 

주거 양상의 춘추전국시대

하지만 이후 인구 밀도가 높아지면서 하천의 위생적 문제가 심각해지고 동시에 자동차도로 확보가 도시 형성에 가장 중요한 필요조건으로 주목받았다. 이에 따라 하천 부지는 대부분 복개되고 그 역할을 상하수도 시설이 대신 맡게 됐다.

 

이후 서울에는 대형 간선도로가 들어서면서 과거 하천 중심의 커뮤니티에서 도로 중심의 커뮤니티로 옮겨갔다. 실개천으로 시작된 구불구불한 골목길의 원형은 급속한 산업화를 거치며 더 복잡해지고 확대됐다.

 

지금과 같이 복잡한 서울의 골목길 모습까지 오게 된 데는 60년대부터 농촌에서 서울로 내몰린 후 70년대를 지나 80년대까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도시 빈민의 주거지와도 관련이 깊다.

 

달동네 불량 주거지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인간성이나 사회성이 불량한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우리 사회가 임의로 규정한 물리적 환경의 수준에 따라 상대적으로 정해진 용어일 뿐이다.…

30년 전의 달동네(그 당시는 판자촌으로 불렸다) 무악재에 살던 사람들이 봉천동으로 옮긴 것같이, 서울의 달동네는 항상 그 위치를 바꾼다.

제법 정착이 된 강북 판자촌과 달동네에는 이른바 도심 재개발이 시작되고 중산층의 아파트가 들어서게 된다.

하는 수 없이 밀려나는 달동네 원주민들은 살림살이를 이고 지고 강을 건넌다.

당시 아무도 살지 않는 산꼭대기에 다다르면 짐을 풀고 새로운 달동네를 만든다.

1960년대 중반, 중구 충무로 남산 일대의 판잣집들이 헐리면서 사당동에 달동네가 생겼고,

용산구 한남동과 서빙고동이 재개발되면서 신림동에 달동네가 생겼다.

주종원, ‘주택단지건설의 실제와 회고’, 도시문제 제17권 제11호,1982,p.40.

 

70년대의 경제적인 도약과 함께 서울의 주택시장은 공공 또는 민간 주도의 아파트와 단독주택, 다세대주택, 다가구주택, 무허가주택 등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됐다. 폭발적인 주택 수요는 당시 경제성장을 앞세운 관 주도방식의 개발과 맞물려 주택에 대한 사람들의 개념도 경제성 우선으로 자리 잡았다.

 

80년대 초 한국 현대건축 자성의 목소리를 담은 건축가들의 대담을 보면 70년대 건축가들이 도시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를 얘기하는 걸 볼 수 있었다. 

 

오히려 해방 직후 국가를 재건할 당시 건축가들이 논의하고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것처럼 영향을 행사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 섞인 얘기도 있었다.

 

결국 70년대 이후 대한민국의 주거는 상대적으로 작은 자본의 집 장수부터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는 아파트 건설사들의 경제 논리로 그 양상이 결정됐다.

 

이번 호에서는 CFBT 이론에서 현장의 불을 이해하는 데 지표로 사용하는 Be-SAHF1) 중 Building environment에 역사적인 관점을 추가해 우리 주변의 주거맥락을 끌어오고 싶었다.

 

Building environment는 연기와 공기 유동, 열, 불꽃 같은 다른 지표와 다르게 불이 점화되기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

 

주거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 지식이 현장 활동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진 않지만 후에 나머지 네 가지 지표들과 함께 통합해 현장판단(Size-up)과 위험평가를 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한다. 

 

▲ [그림 2] Building 지표에 대한 마인드맵, Ed Hartin 제작


[그림 2]는 CFBT-US의 Ed Hartin이 만든 마인드맵이다. Building environment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정리하는 데 사용하시기 바란다.

 

 


1) Building environment-Smoke Air(track), Heat Flame

 

참고문헌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웹페이지, 상수도(theme.archives.go.kr/next/koreaOfRecord/waterworks.do)

전우용, 서울은 깊다. p308-309, 돌베개

전남일, 손세관, 양세화, 홍영욱, 한국주거의 사회사, 돌베개

유현준,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p143-p144, 을유문화사

박태원, 천변풍경 p25-26, 청계천 빨래터, 문학사상

이재선, 일제강점 전반기(1910~1925) 소방운영체계의 변화와 소방서의 설립,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3, pp.15

이연경, 한성부 일본인 거류지의 공간과 사회: 1885년~1910년까지 도시환경변화의 성격과 의미,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 p.111~112.

주종원, 주택단지건설의 실제와 회고, 도시문제 제17권 제11호,1982. p.40.

한국 현대건축의 자화상, 공간 1981년 12월호. p.16.

Ed Hartin, FireDevelopment and Fire behavior indicators, CFBT-US

 

서울소방학교_ 박지수 : pjs8891@seoul.go.kr

 

<본 내용은 소방 조직의 소통과 발전을 위해 베테랑 소방관 등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 2019년 5월 창간한 신개념 소방전문 월간 매거진 ‘119플러스’ 2022년 12월 호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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