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취재] 배터리 소화기 기준 정립 반년인데 인증품이 없다… 왜?아리셀 화재 겪고 만든 리튬 배터리 소화기 기준, 업계 “기준에 문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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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화기의 소형리튬이온전지화재 소화성능의 KFI인증기준 |
[FPN 최누리 기자] = 정부가 아리셀 참사 비극을 막겠다며 내놓은 배터리 관련 소화기 인증이 현실과 동떨어진다는 비판이 나온다. 제정 후 반년이 넘었지만 단 하나의 소화기도 인증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소방산업기술원(이하 KFI)은 개발 방향성을 제시하는 측면인 만큼 업체에서 연구를 통해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선을 긋고 있다. 하지만 연말까지 인증업체가 없다면 개선을 검토하기로 했다.
소방청은 지난해 12월 18일 ‘소화기의 소형리튬이온전지 화재 소화성능의 KFI인증기준(이하 배터리 소화기 기준)’을 제정ㆍ시행했다. 이 배터리 소화기 기준에는 소형 배터리 화재 진화를 위한 성능시험 방법 등이 규정됐다.
아리셀 화재 당시 보관된 배터리에서 불이 나자 직원들은 분말 소화기로 초기 진화에 나섰지만 화재를 진압할 수 없었다. 배터리에 적응성을 갖춘 소화기 관련 기술기준이 만들어진 결정적 배경이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기준이 만들어진 지 반년이 넘었지만 이 인증을 통과한 소화기는 없다. 성능이 검증되지 않은 소화기가 시장에 버젓이 유통되면서 배터리 화재에 대비하려는 소비자들의 혼란만 가중되고 있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도대체 어찌 된 내막일까. <FPN/소방방재신문>이 집중취재했다.
배터리 소화기 기준 정립을 부른 아리셀 화재
화재는 지난해 6월 24일 오전 11시 31분께 경기 화성 아리셀 공장 3동 2층에 보관된 리튬 배터리 더미에서 시작됐다. 동시다발적인 폭발이 발생하면서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당시 상황이 담긴 CCTV 영상을 보면 배터리 폭발 후 불과 42초 만에 작업장은 검은 연기로 가득 찼고 내부는 암흑으로 뒤덮였다.
화염이 발생하자 직원들은 소화기를 이용해 초기 진압에 나섰지만 순식간에 번진 불을 끄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연쇄적인 폭발과 함께 작업장 내부 전체로 번진 불길은 많은 양의 유독가스를 내뿜으며 23명의 소중한 목숨을 앗아갔다.
아리셀 화재가 일반 화재와 달랐던 점은 배터리로부터 시작됐다는 거였다. 겉으로는 불이 꺼진 것처럼 보여도 내부 온도가 1천℃ 이상 치솟아 다시 폭발하는 ‘열폭주 현상’은 배터리에서 발생하는 화재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온 국민에게 각인시켰다.
화재 이후 정부는 재발 방지책 마련에 나섰다. 소방청은 소규모 리튬 배터리 화재 관련 KFI인증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TF를 꾸리는 등 기준 정립과 도입 계획을 발표했다. 마침내 화재 발생 약 6개월 만인 12월 18일 ‘배터리 소화기 기준’이 시행됐다.
![]() ▲ 소방관들이 아리셀 공장 내부로 들어가고 있다. ©경기소방재난본부 제공 |
새롭게 제정된 ‘배터리 소화기 기준’ 어떻길래…
소방청은 배터리 소화기 기준을 정립하면서 기존 소방용품 의무 검인증을 거친 소화기여야만 한다는 전제를 달았다. 쉽게 말해 일차적으로 형식승인을 받은 소화기만 배터리 소화기의 인증까지 득할 수 있다.
시험에 사용되는 재료는 100Wh 이상 니켈ㆍ코발트ㆍ망간(NCM) 배터리 셀 5개를 조합한 소형리튬이온배터리로 외부에 커버 등 보호장치가 있으면 이를 제거한 뒤 시험하도록 했다. 총용량은 1천Wh 이하로 제한했다.
시험 절차는 크게 세 단계로 나뉜다. 첫 번째는 사용할 배터리가 정상적으로 연소하는지 확인하는 사전 검증 단계인 ‘전지 적합성시험’이다. 가열장치를 1, 2번 셀 사이에 붙이고 분당 5~10℃씩 올려 열폭주를 유도한 뒤 5개 셀 모두 연소해야만 비로소 시험용 배터리로 사용할 수 있다.
두 번째 단계는 ‘적합성시험’이다. 가열장치 인접 셀에서 불꽃이 보이는 즉시 소화기로 소화약제를 분사했을 때 여러 제한 사항을 통과해야 한다. 제한 규정은 ▲방사 종료 후 화염이 없어야 할 것 ▲1시간 뒤에도 5개의 셀 중 최소 1개는 타지 않은 상태로 남을 것 ▲타지 않은 셀의 전압이 3.7V 이상을 유지할 것 등이다.
마지막 단계에선 소화기가 다양한 환경에서도 동일한 성능을 내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규정된 사용 상ㆍ하한 온도에서 12시간 보존한 후 ‘적합성시험’을 각 온도 조건마다 2회씩 총 4회를 반복한 후 모두 통과돼야 최종 인증이 부여된다.
![]() ▲ 아리셀 공장 화재 현장 주변에서 대기 중인 소방차량들 ©FPN |
인증 못 받는 배터리 소화기, 엉성한 기준 탓?
배터리 소화기 기준이 등장하고 수개월 동안 인증 제품이 나오지 못한 이유는 뭘까. 배터리 소화기 개발에 한창인 국내 소화기 업체들은 새롭게 정립된 기준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애초부터 기준 제정 과정에서 소방청 또는 KFI가 관련 시험의 타당성을 확인하고 검증해야 하지만 이런 과정 없이 기준을 만들다 보니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경제적 손실과 시간 등 피해가 고스란히 제조업체에 전가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업계는 배터리 소화기 기준 제정 당시 참고한 해외 기준(NTA 8133)과 비교해 일부 조건이 터무니없이 가혹하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셀을 촘촘히 배열하는 시험 환경이나 열폭주 유발 방식은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시각이 많다.
A 업체 관계자는 “NTA 8133의 경우 25Wh 셀 4개로 구성된 배터리 세트 6개를 직렬로 배열하고 그중 한 셀에서 난 불이 다른 셀로 번지는 걸 막는 방식”이라며 “우리나라는 100Wh짜리 셀 5개를 최대한 밀착시킨 하나의 배터리에서 타지 않은 셀을 남기는 방식이라 개념 자체가 다르다”고 했다.
이어 “이는 열 전이 속도나 대응 시간에 있어 큰 차이를 유발해 난도가 비교할 수 없이 높다”며 “배터리 소화기 기준이 NTA 8133을 참고해 만든 만큼 배터리 나열 방식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열폭주 유도 방식도 문제로 지적했다. 현재 배터리 소화기 기준은 분당 5~10℃씩 올려 셀을 가열한다. 이로 인해 열폭주 발생 시점이 불규칙할 뿐 아니라 열폭주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어 시험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A 업체 관계자는 “느린 가열은 5개 셀을 열폭주 대기 상태로 만들어 한 번 터지면 모두 터질 수밖에 없다”며 “과전류나 과전압 방식으로 정해진 시간 내 특정 셀만 열폭주를 일으켜야 나머지 셀을 살릴 가능성을 시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B 업체 관계자는 “가열장치를 1, 2번 셀 사이에 설치하도록 규정했는데 결국 이들 셀이 동시에 열폭주가 발생하는 방식”이라며 “이 때문에 나머지 3, 4, 5번 셀로 불길이 퍼지는 속도가 빨라 화재를 진압하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C 업체 관계자는 “현행 기준에선 100Wh 이상의 셀 5개 조합을 소형리튬이온전지로 정의했는데 이보다 더 작은 배터리가 있음에도 이를 소형으로 보지 않은 건 문제가 있다”면서 “각 셀 전압을 무조건 4.05V 이상으로 규정한 부분 역시 3.7~3.8V 배터리를 과충전해 사용하는 모순을 불러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과충전된 상태로 시험을 진행한다면 배터리 발화 또한 과충전으로 인해 시작되도록 해야 한다. 현재 기준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며 “가열 발화 방식의 시험에서 배터리 과충전을 하도록 한 건 의미가 없다”고 꼬집었다.
D 업체 관계자는 “시험 모형 규정에서는 배터리 셀을 고정하도록 돼 있는데 이 규정에선 테이핑 등을 통해 흔들리지 않도록 하라고만 설정됐다”며 “셀 고정을 위한 조임 토크 등 관련 기준이 부재해 고정장치 탈락 여부에 따라 소화성능이 완전히 다르게 나타나는 부분도 문제”라고 말했다
시험에 쓰이는 배터리의 표준화 미비도 문제로 지적된다. E 업체 관계자는 “업체 대부분은 시험을 위해 재활용 배터리를 찾는데 이 배터리가 얼마나 쓰였는지 등은 공급업체조차 모른다”며 “동일 모델ㆍ사용 환경 등 적합성시험에서 사용된 배터리 출처가 불분명하다는 건 소화성능에 대한 신뢰성 문제로도 이어질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KFI “현 기준이 소화약제 성능 검증 위한 최선책”
이러한 문제는 지난 4일 서울 양재 aT센터에서 열린 KFI와 소화기 제조업체 간담회에서도 불거졌다. 이 자리에서 KFI는 배터리 소화기 기준이 세계적으로도 전례가 없는 새로운 기준인 만큼 국내 업계의 기술개발 역량이 높아져 가는 과도기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KFI 관계자는 “배터리 화재 소화 성능을 시험하는 기준은 세계 어느 곳에도 정립된 바 없다”며 “아리셀 화재 이후 긴급하게 대응하는 과정에서 NTA 8133 기준과 KFI 연구소에서 검토하던 시험 방법을 접목해 합리적인 방향을 제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업계가 말하는 기술적 어려움은 인지하고 있지만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바로 연구개발”이라며 “용기 용량을 키우고 압력을 높이는 등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이 기준은 법적 강제성이 없는 인증으로 업계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거다”고 말했다.
시험 방식에 대해선 “현재 배터리 소화기 기준은 개방된 셀 형태라 그나마 소화약제 투입이 가능하지만 완제품 형태로 시험하면 어떤 소화기로도 불을 끌 수 없다”면서 “현재 방식이 소화약제 성능 자체를 시험할 최선의 방법이다”고 선을 그었다.
KFI는 올해 연말까지 인증을 획득한 업체가 없다면 배터리 소화기 기준 개선을 검토한다는 입장이다. KFI 관계자는 “아리셀 화재 이후 긴급 대응으로 충분한 연구나 검토 기간이 부족했다는 점은 인정한다”면서도 “업체별로 개발한 소화기가 기준대로 안 되니 방법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주장은 곤란하다”고 일축했다.
그러면서 “만약 올해 연말까지 어느 업체도 배터리 소화기 기준을 도저히 맞출 수 없다고 한다면 그때 재검토를 할 계획”이라며 “조금만 지켜봐 주고 같이 고민하면서 해결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최누리 기자 nuri@fpn119.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