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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로 튄 소방관의 퇴직 인생- 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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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병원 PMC 유기운 | 기사입력 2026/04/03 [10:00]

아프리카로 튄 소방관의 퇴직 인생- Ⅻ

서울대병원 PMC 유기운 | 입력 : 2026/04/03 [10:00]

12. 바람이 불어오는 곳, 둘. 

택시가 질주하듯 들어오고 차 뒷문이 튕기듯 열렸다. 고개가 꺾인 축 늘어진 어린 몸이 중년 남성의 팔에 안겨있었다. 어떤 움직임도 없는 소녀의 머리카락에 말라버린 피가 엉겨 붙어 있다. 

 

또 한 대의 택시가 들어온다. 택시에서는 마른 체형에 새치가 난 안경 쓴 50대 남성이 내린다. 그는 당혹하고 상기된 얼굴로 “죽었지”라며 응급실을 나오는 같은 표정의 젊은 남성에게 체념하듯 외쳤다. 

 

대답 대신 고개가 떨궈진다. 짧은 순간 내 눈 앞에 펼쳐진 절망의 순간을 원광대학교 병원 응급실 입구 계단 위에서 바라만 봤다. 익산 어느 초등학교에서 1학년이나 2학년이 됨직한 아이가 추락한 모양이었다. 

 

이날은 며칠 전 아침 등굣길에 생면부지의 어른과 택시로 병원에 모셔다드렸던 뺑소니 사고를 당한 노인의 안부가 궁금해 찾아뵙고 막 나오던 참이었다. 군대 가기 전이니 86년이나 87, 88년 봄 언제쯤이었을 것이다. 

 

굵직한 시간의 때를 모를 만큼 세월이 흘렀지만 어린 생명의 꺾인 목과 머리의 골절 부위를 따라 응고된 검붉은 피, “죽었지” 하던 늙은 선생의 외침만은 아직도 기억의 밑바닥에 따개비처럼 붙어 있다.

 

대학생이던 나에게 이 사건이 진로를 선택하는 데 영향을 미쳤던 건 아니다. 환자 치료는 병원에서 의사나 간호사가 하는 것이고 병원 밖 이런 사고에 구급차나 구급대원 같은 개념이 아예 없었다.

 

졸업 후 백수던 나는 하루 일하고 하루 쉬는 소방관이 공부할 시간이 많다고 해서 소방관이 됐다. 미국 피츠버그 구급대원의 현장 응급처치를 보고서야 ‘진짜’ 구급대원이 되고 싶었다. 

 

의식의 밑바닥에 들러붙어 있던 어린 소녀의 죽음, 죽을 것 같았던 할머니 환자를 살려낸 피츠버그 구급대원, 119 지령서에 찍혀 있던 숱한 현장을 헤매던 출동들이 결국 나를 아프리카에 세웠던 걸까? 

 

김춘수의 시 ‘꽃’처럼 과거 파편화된 몸짓들 속에서 아프리카에 선 인생의 의미를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한국에서나 카메룬에서나 그 꽃은 아직 피우지 못한 꽃이다. 

 

무게가 버거울 때도 많았다. 구급대원으로 일과 학업을 병행할 때 일주일 세 번, 새벽에 서울대병원으로 혈액 투석을 받으러 가던 20대 쌍둥이 자매가 있었다. 밤새 출동에 시달리다 보면 예정된 새벽 6시 출동이 그렇게 부담되고 피곤할 수 없었다. 

 

자매에게는 양발이 없었다. 매번 안아서 구급차 들 것에 앉혀야 했다. 쌍둥이 자매를 보며 한 번도 웃지 않았다. 생명의 온기가 없던 어린 제자를 꼭 안던 젊은 선생의 두 팔이 아니라 입을 꽉 다문 얼굴로 자매를 깨지지만 않으면 되는 ‘깨짐. 주의’ 물건처럼 들것에 실었다. 

 

푸석푸석한 피부에 흰머리 가득한 자매의 엄마는 그런 나를 죄지은 사람처럼 지켜봤다. 신발 한 번 신어본 적 없는 쌍둥이 자매에게 단 한 번도 편안한 신발이 돼 주지 못했다.

 

의학 드라마에 나오는 사명감 넘치는 구급대원이 되고 싶어 일과 학업을 병행했지만 구급대원에게 중요한 건 처치 술기나 의료 지식만이 아니라는 건 학교에 다니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격일마다 하루씩 꼬박 일하며 되고 싶던 구급대원이 미소조차 없이 긴장과 피곤, 짜증으로 범벅인 얼굴은 분명 아니었다. 적어도 쌍둥이 자매에게 나는 그저 프로가 되고 싶은 아마추어에 불과했다. 차라리 학교에 다니지 말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서울 중부소방서 현장대응단에서 근무할 때 소방 펌프차로 구급차보다 현장에 먼저 도착한 적이 있었다. 새벽, 편의점주가 죽어있다는 신고가 그랬다. 편의점에 물건을 납품하러 온 기사가 편의점 안쪽 창고에서 죽은 점주를 발견하고 신고했다. 선택한 죽음이었다. 

 

얼마 후에는 오후 5시쯤 다세대 주택 지하 작은 봉제공장에서 사장이 죽었다. 역시 같은 죽음이었다. 목매단 중년 남성의 다리 밑 작업대 위에 편의점에서 산 소주병과 먹다 만 핫바가 놓여 있었다. 

 

일하다 사고로 죽는 산재가 아니라 생계를 위해 물건값 바코드를 찍고 옷을 만들던 그 자리에서 선택한 죽음 앞에 비애를 느꼈다. 그 비애는 아버지의 나이가 돼서야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보내드렸다는 자책과도 닿아있었다. 

 

상황실에서 신고 전화를 받는 일도 했었다. 40대 여성의 화재 신고 녹취를 들은 적이 있다. “어떤 상황이에요?”라는 119 상황실 직원의 질문에 신고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연달아 “어떤 상황입니까?” 신고자가 대답하지 못하자 신고접수자는 더 질문하지 않았고 현장으로 출동하는 소방대에 신고 내용을 전달하는 목소리를 끝으로 녹음도 끝났다. 

 

소방차는 현장으로 출동했고 40대 여성은 아이들과 화재로 죽었다. 그 목소리는 여성이 마지막으로 세상에 남긴 절박한 구조요청의 소리였다. 이 신고 녹음을 들으며 그렇게 수많은 신고를 받으면서도 화재 진압에 필요한 정보만 파악하려 했지 신고자의 안전을 먼저 고려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삶과 죽음의 측정할 수 없는 경계가 때론 아주 작은 우연적인 요소로 갈라지는 걸 보면서 현장에서 생명을 살리는 것 못지않게 시스템의 힘을 믿게 됐다.

 

밤새 울리던 긴급 출동 방송과 등하교에만 왕복 4시간이 걸리던 응급구조학과 3년, 긴급 신고가 쉼 없이 울리던 상황실 현장이 아프리카 카메룬으로 바뀌었다. 

 

역할도 예전의 것이 아니다. 병원 밖 현장에서 환자를 처치하고 신고 전화를 받던 손으로 병원 밖 응급의료체계 시스템을 만드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40년 전 익산의 어린 소녀를 태웠던 택시보다 더 낡은 택시들이 오늘도 먼지 바람을 일으키며 큐리 병원에 들이닥친다. 오토바이를 타던 두 젊은이는 트럭에 치여 한 명은 현장에서 죽고 한 명은 몸통 아래 다리 한쪽이 완전히 절단된 채 택시로 왔다. 

 

일하다 떨어진 20살 청년은 트럭 짐칸에 실려 왔다. 동료들은 그 청년이 죽었는지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코피가 조금 난 것 외에 뚜렷한 외상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그 몸을 쓰다듬을 뿐이다.

 

어린 제자의 몸을 감싸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익산의 선생처럼 카메룬에서는 다친 자와 지켜보는 자 모두 눈앞에 닥친 현실 앞에 무기력하다.

 

▲ 일하다 떨어져 죽은 청년

▲ 그가 마지막으로 타고 온 화물차

 

다친 환자만이 아니다. 2017년 카메룬에서 제일 큰 도시 두알라(Douala)의 보건 지역 두 곳을 대상으로 진행된 인구 기반 급성 심정지 코호트(cohort) 연구에 따르면 두 지역 거주자 18세 이상 성인 8만6188명 중 1년간 288명이 죽었다. 그중 27명이 심정지였다. 

 

절반 이상이 집에서 발생했고 열에 아홉이 목격된 심정지였다. 목격자가 가족인 경우도 열에 여섯 건이 넘었다. 심폐소생술이 시행된 경우는 단 한 건이었다. 카메룬에서 가장 큰 도시의 병원 접근성이 가장 좋은 중심가의 현실이 이렇다. 

 

지난해 야운데 인근 동네에서 2천 가구를 대상으로 벌인 응급의료 이용 실태 역학조사에서 응답자 절반 가까이가 사뮤(SAMU) 시스템의 존재를 모르거나 알아도 어디로 신고해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구급차로 병원에 갔다는 응답도 손에 꼽을만한 숫자다. 2025년 큐리 병원에 내원한 환자 5448명 중 구급차를 이용한 환자는 몇십 명에 불과했다. 

 

카메룬에서 병원 전 응급의료 서비스를 받으려면 휴전선 철책 같은 장벽을 몇 개 넘어야 한다. 응급환자보다 긴급번호가 먼저 죽어있으니 바로 연락할 곳이 없다. 설사 아는 지인을 통해 병원에 연락한 들 주소 체계가 없다. 

 

구급차는 엉망인 도로를 헤매며 물어물어 가거나 휴대전화로 위성 지도를 참고해야 한다. 구급차가 언제 올지 모른다. 이제 신고자와 환자는 합리적 선택 앞에 놓인다. 언제 올지 모르는 구급차를 기다리든 지나가는 택시나 화물차 아니면 양고(yango)로 택시를 불러 병원에 가든 결정해야 한다. 

 

마지막 가장 큰 장벽은 ‘돈’이다. 지난해 큐리 병원 내원 환자 중 병원비를 못 낸 환자가 307명이다. 병원비를 못 내는 환자가 이렇게 많은데 1만 세파나 그 이상을 각오하고 구급차를 찾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며칠 전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한 20살 청년은 장이 천공돼 복막염 수술을 했다. 치료비와 수술비로 90만 세파가 들었다. 가족들은 그 돈을 친인척과 마을 사람들에게 십시일반 꿔서 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차 수술을 급하게 해야 했다.

 

결국 정중식 박사께서 후원하는 코리아 펀드에 손을 내밀었고 정 박사님을 대신해 코이카 봉사단원 이수환 간호사가 2차 수술비 35만 세파를 전달했다. 그 돈을 환자 아버지는 떨리는 손으로 받았다. 

 

주름진 검은 얼굴에 눈물이 흘렀다. 장애가 있어 절뚝거리며 돌아가는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워진 것 같아 내 마음도 가벼워졌다. 

 

병원 전 응급의료체계는 빠른 대응과 적절한 현장 처치를 제공하고 환자를 적합한 의료기관으로 이송해 생존율을 높이는 게 목적이다. 이 시스템은 부자 나라의 것이다. 돈 있는 나라의 시스템을 그대로 카메룬에 옮겨 심을 순 없다. 

 

설령 옮겨 심은 들 귤은 탱자가 되거나 말라죽을 것이다. 가난한 나라의 현실을 토대로 만들어야 한다. 있는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인구가 3백만인 야운데에 필요한 구급차가 50대라고 해보자. 기존 가지고 있는 소방과 병원의 구급차를 합하면 숫자는 부족하지 않다. 

 

직원들은 이미 정부가 고용하고 있으니 병원 전 구급대원으로 훈련만 시키면 된다. 물론 필요한 장비와 구급차 운영ㆍ유지에 들어가는 비용이 추가로 들게 된다. 상황실을 만들고 신고 전화를 받고 구급차를 출동시킬 수 있으면 된다. 

 

작동하지도 않는 사뮤 시스템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 이건 돈의 문제가 아니라 생각의 전환과 의지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장 직원 교육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런 교육만으로 구조를 바꾸긴 어렵다. 

 

더구나 일회성으로 끝난다면 목표로 정한 숫자를 채우는 것 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려울 수 있다. 아래로부터의 교육도 필요하지만 위로부터의 정책 추진도 중요하다는 믿음이 생겼다. 리더도 육성해야 한다. 초청 프로그램에 좋은 인재를 찾아 추천하는 것도 현지 매니저의 일이다. 

 

큐리 원장인 월롱에게 물었다. “카메룬 병원 전 응급의료체계가 작동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필요할까요?” 월롱이 말했다. “5년 봅니다” 월롱은 자존심이 세고 권위적이면서 추진력이 있고 야심도 있다. 그런 닥터 월롱이 나에겐 뜨거운 감자 같기도 하다. 

 

한번은 큐리 중정 공사를 두고 부딪쳤던 적이 있다. 월롱은 병원 한가운데 중정을 천장으로 막아 3층을 창고, 2층을 교육장으로 만들었다. 문제는 공사가 너무 허술하다는 데 있었다. 코이카 사무실에서 한국 건축팀의 조언을 받아 공식 문제를 제기했고 월롱은 이를 받아들여 보강 공사를 했다. 

 

보강 공사인데 비전문가인 내가 봐도 불안해 보였다. 천장이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1층 환자들의 안전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현안을 협의하면서 중정의 안전에 관한 코이카 사무소의 우려를 전달했다. 

 

“닥터, 월롱. 한국은 안전 문제에 아주 민감합니다. 조만간 한국 건축 전문가들이 출장 오는데 중정 공사가 안전하게 마무리됐는지 조언을 받아 봤으면 합니다” 

 

월롱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내가 애도 아니고 20년 이상 이 분야에서 일했습니다. 카메룬 엔지니어들도 안전하다고 했는데 다시 검사를 받으라고요? 그럴 거면 당신들이 와서 원장 하십시오. 나는 원장 자리에서 물러날 테니까” 

 

닥터 월롱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예상외로 강한 그의 반응이 당황스러웠다. 그의 화가 식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며칠간의 냉각기를 거치고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월롱이 보였다. 말없이 먼저 가서 그의 손을 잡았다. “Bonjour!” 그가 인사했고 우린 악수했다.

 

닥터 월롱을 보면서 리더십이 왜 중요한지 깨달았다. 비땅에서 월롱으로 원장이 바뀌고 코이카와 서울대병원 프로젝트팀의 지원이 상승효과를 가져오면서 큐리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월롱은 아직도 낡은 관행과 사투 중이다. 관습에 얽매여 변화에 저항하는 직원들, 환자 보호자에게 돈을 갈취한 경비원들부터 수술을 대가로 웃돈을 요구하는 의사들까지…. 때론 그가 외롭고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역시 카메룬 사회의 구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 않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지만 그를 돕고 싶었다. 

 

어느 날인가부터 익숙한 얼굴의 경비원이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고 새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처럼 부패가 상수인 비도덕적 사회에서 경비원들 역시 그에 맞춰 살다 일자리를 잃은 것이다. 

 

언젠가는 수술을 빌미로 돈을 챙기는 의사도 없어지길 바란다. 한국 건축 전문가들이 큐리 병원을 둘러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큐리가 너무 달라졌다”면서 하나같이 “닥터 월롱을 지원해줘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닥터, 월롱! 나는 당신이 큐리 원장으로 끝날 사람은 아니라는 걸 잘 압니다. 당신이 당신 나라 시스템을 만드는 데 더 큰 힘을 발휘할 자리에 올랐을 때 당신을 도울 전문가 그룹을 만드십시오.

 

의사든, 간호사든, 구급 운전기사든 전문가 그룹을 만드는 데 코이카와 서울대병원 프로젝트팀이 당신을 도울 겁니다. 나도 힘이 돼 드리겠습니다” 

 

고개를 끄떡이는 월롱의 표정으로 대답을 들었다. 병원 전 의료서비스가 낮은 수준일망정 5년 안에 원활하게 작동한다면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지난해에 뿌린 씨앗 덕분인지 내부 학습 분위기가 큐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제 조금은 큐리를 벗어나 활동 영역을 넓히고 싶었다. 마침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Organization) 14차 세계 장관회의가 야운데에서 3월에 예정돼 있었다. 한국을 포함 전 세계 3천 명의 대표단이 참가하는 큰 국제회의였다. 

 

프로젝트를 하면서 친해진 은시말렌(Nsimalen) 공항 의사 라파엘에게 직원 응급처치 교육을 제안했다. 무엇보다 타이밍이 딱 좋았고 라파엘에게나 공항 최고 책임자에게도 윗사람에게 보고하기 좋은 프로젝트라고 확신했다. 

 

제안서를 보내고 한 2주 정도 지나 교육 허가 공문을 받았다. 몇 가지 교육 준비를 마치고 2월 26일 목요일에 공항 직원 중 의무 직원을 대상으로 응급처치 교육을 진행했다.

 

우리가 추진 중인 프로젝트 소개, 병원 전 응급의료체계, 환자 평가, ABC 기본 응급처치, 심폐소생술과 제세동기(AED) 사용법을 이론 강의와 실습으로 채웠다. 

 

▲ 코이카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나혜선 부소장

▲ 이론 강의


죽음이 숫자로도 잘 기록되지 않는 카메룬에서 이런 교육 한 번이 큰 변화를 불러올 수 없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안다. 나름의 더 큰 계획이 있어 교육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충분히 그 목표는 달성했다.

 

이런 파이프라인을 통해 더 큰 파이프라인을 연결해 볼 계획이다. 아래부터 올라가는 작은 파이프라인에서 위부터 내려오는 큰 파이프라인이 연결될 수 있도록 말이다. 

▲ 실습

▲ 실습 이후 공항 직원들과

 

닥터 라파엘에게서 청신호를 들을 수 있었다. 두알라 공항도 이번 교육에 관심을 두고 지켜봤다는 것. 다음엔 공항 경찰이나 안전요원 또는 소방대원을 대상으로 응급처치 교육을 추진해 볼 계획이다. 

 

한국 선교사님이 만든 정식 신학대에서도 신학생들을 대상으로 응급처치 강의를 요청해 왔다. 경련 환자가 있었는데 모두 지켜만 보고 있었다는 게 이유였다.

 

낙후된 지역에서 종교 지도자로 지역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신학생들에게 응급처치 교육을 하는 것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라 판단했다. 흔쾌히 선교사님의 제안을 받아들여 3월 24일에 실시하기로 했다. 

 

올해에는 소방학교, 경찰학교, 간호대와 의대에 병원 전 응급처치 과정을 개설하거나 특강을 해보고 싶다. 이런 모든 노력이 신경계 시냅스처럼 연결돼 카메룬 병원 전 응급의료체계가 활성화되는 데 보탬이 됐으면 좋겠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 그 길은 흙먼지 날리는 길이겠지만 그 바람이 내 마음속에서 불어오는 것임을 나미비아와 짐바브웨 여행을 통해 깨달았다. 

 

▲ 코이카 김유겸 소장과 대사관 하유선 서기관

▲ 진짜 의사 메토고와 함께


한국에서 서글펐던 바람들이 내 마음을 두드리고 있는 건 아닐까? 익산 선생님의 무기력했던 손이, 차갑기만 했던 내 두 팔이 이제 카메룬 사람들이 심정지 환자를 살리기 위해 가슴을 누르는 힘찬 손이 되길 희망한다.

▲ 야운데 은시말렌 국제공항 교육을 마치고 공항 직원들과 기념 촬영

 

내가 쌍둥이 자매와 그 어머니에게 돼 주지 못한… 따뜻하고 튼튼한 신발이 카메룬 사람들에게는 돼주고 싶다. 아마 카메룬 병원 전 응급의료체계 프로젝트 현지 매니저 일을 마칠 때면 카메룬을 딛고 그 너머 아프리카를 바라보고 있을지 모르겠다.

 

튀는 대로 가볼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그간 생계형 매니저에게 귀한 지면을 내어주신 <119플러스>와 열두 번의 긴 넋두리를 읽어주신 분들께 깊은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유기운

서울에서 생계형 소방관으로 30년 근무했다. 현재 소방관 인생을 마무리하고 갑자기 아프리카로 튀어 카메룬 야운데에서 코이카 병원 전 응급의료체계(EMSS) 구축 프로젝트 현지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서울대병원 PMC_ 유기운 : waterfire119@naver.com

 

<본 내용은 소방 조직의 소통과 발전을 위해 베테랑 소방관 등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 2019년 5월 창간한 신개념 소방전문 월간 매거진 ‘119플러스’ 2026년 4월 호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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