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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로 튄 소방관의 퇴직 인생-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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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병원 PMC 유기운 | 기사입력 2025/08/04 [10:00]

아프리카로 튄 소방관의 퇴직 인생-Ⅳ

서울대병원 PMC 유기운 | 입력 : 2025/08/04 [10:00]

04. 카메룬에는 구급대원이 없다

 

사뮤(SAMU) 교육 시간을 수요일 오후 1시에서 4시로 변경했다. 큐리 사뮤는 3조 2교대 근무를 한다. 오후 5시가 근무 교대 시간이니 이 시간이면 저녁 근무 직원들은 조금 일찍 출근하고 퇴근하는 직원들은 한 시간 늦게 집에 가면 된다. 비번인 직원들이 오는 수고를 덜고 교통비도 아낄 수 있다.

 

교육 첫날부터 전문 직업성을 힘줘 말했다. 우선 “Patient Carrier”라는 말을 쓰지 말자고 했다. 또 병원 전 응급의료체계에서 구급대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하면서 “응급처치 전문가가 돼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하지만 전문 직업성이라는 말이 이들에게 얼마나 공허하게 들렸을지 알게 되면서 스스로 부끄러워졌다. 교육을 시작했을 때 큐리 사뮤 직원들은 월급을 두 달째 못 받고 있었다. 이들은 한 달 월급으로 카메룬 돈 6만 세파나 7만5천 세파를 받는다.

 

세파ㆍ원 환율을 후하게 쳐도 한국 돈 15만원이고 많이 받아도 19만원을 넘지 못한다. 이마저도 제때 못 받는 현실에서 이들에게 택시비 몇백 세파는 전문 직업성이나 사명감보다 훨씬 시급하고 절박한 무게일 것이다.

 

문제는 적은 급여만이 아니다. 근무 환경도 열악하다. 큐리 사뮤 대원 대기실은 좁고 더럽다. 선풍기도 없는 이곳에서 쉬고 밥을 먹는다. 낡은 이층 침대에 더 낡은 매트리스 위에서 잠을 잔다. 어떤 대원들은 주들것만 멀쩡한 구급차 안에서 잠을 잔다.

 

이 더러운 매트리스만큼은 바꿔 주고 싶었다. 대기실 사진을 찍어 새로 원장으로 부임한 닥터 월롱(Hollong)에게 보여주고 새 매트리스로 바꿔 달라고 당부했다. 3월에 새 원장으로 온 닥터 월롱은 큐리 병원에 긍정적인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겠다는 약속과 함께 닥터 월롱이 말했다.

 

“여태까지 이런 사진을 보여준 사람은 유 박사가 처음입니다”

 

그 말은 사뮤 구급대를 돌보지 못한 원장의 변명처럼 들리지 않았다. 정중식 박사와 코이카 자원봉사자 간호사 선생들이 떠나고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큐리는 ‘심폐소생술’이 필요한 병원으로 변해 있었다. 그만큼 급하게 손 볼 곳이 많았다.

 

말을 꺼내고 새 매트리스를 받는 데 몇 달이 걸렸다. 그마저도 코이카 간호사 김수미 선생의 노력과 현지 활동비 덕이었다. 카메룬에서는 일이 진행되는 속도가 무척 더디다.

 

대원 대기실과 벽 하나 사이인 큐리 간호사 사무 공간도 열악하기로는 마찬가지여서 이래저래 신임 원장의 큐리 병원 개선 사업에서 사뮤는 아직 찬밥이다.

 

▲ 큐리 사뮤 대기실과 매트리스

 

▲ 큐리 사뮤 대기실과 매트리스

 

큐리 사뮤 교육을 일곱 번 반복하면서 이론 교육만 해 온 것도 아쉬웠다. 사실 실습 교육의 필요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실습 장비가 없었다.

 

여기저기 알아보고 사무실 한쪽에 10년 넘게 쌓여있던 소아용 BVM 몇 개를 혈압계, 청진기, 혈당 측정기 각각 두 개씩과 동공 측정용 펜라이트 하나로 물물교환해서 구했다.

 

▲ 큐리 사뮤 간호사 사무실


큐리 사뮤 직원들은 혈압을 잴 줄 몰랐다. 이들은 건강 검진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본인 혈압이나 혈당이 얼마인지도 몰랐다. 대원들을 찾아다니며 맥박과 혈압을 측정해 주고 이론으로만 설명한 바이탈 사인(Vital Sign)과 결부시켜 본인들의 맥박과 혈압을 설명해 줬다.

▲ 큐리 대원 혈압 측정


성격이 짓궂기로 한몫하는 둠베(Ndoumbe)는 혈압을 재 주자 내 심장과 폐 소리를 들어보겠다고 청진기를 자기 귀에 꽂았다.

 

▲ 큐리 사뮤 대원 둠베(Ndoumbe)와 함께

 

▲ 큐리 사뮤 대원 둠베(Ndoumbe)와 함께

 

병원 어딘가 처박혀있던 상반신 마네킹과 혈압계, 청진기만으로도 8, 9, 10차 교육을 거뜬히 할 수 있었다. 말과 사진, 동영상으로 배우던 환자 의식과 호흡 확인, 혈압 측정 등 환자 평가 이론 교육이 대원들의 자발적 학습과 서로 가르쳐주는 공부의 장으로 채워졌다.

 

기대 이상의 반응이었다. 실습수업을 통해 교육 오리엔테이션에서 소극적이던 직원들의 태도에 긍정적인 변화가 조금씩 뿌리내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큐리 병원 코이카 봉사단원 김수미 간호사


몇 달 전 큐리 병원 직원들의 월급이 두 달 치 밀렸을 때 구급대원 한 명이 월세 낼 돈이 없다면서 도와주길 부탁했다. 난감했다.

 

구급대원 교육에 참석하려는데 올 차비가 없다고 할 때 월급도 못 받는 사람들에게 전문 직업성이 어떻고 하면서 비번 날 교육에 오도록 하는 게 얼마나 맥 빠지는 말인지 회의감이 들었던 나는 이제 작은 희망을 보았다.

 

▲ 환자 평가 실습

 

그 희망은 작지만 아직 갈 길이 먼 내게 소중한 경험이었다. 꺼트리고 싶지 않다.

 

사실 큐리에는 현장 출동 구급대원이 없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됐다. 내게 배우면서 나에게 가르침도 주는 사뮤 동료들은 119구급대원처럼 환자 처치를 위해 현장으로 출동을 나가지 않는다.

 

큐리 현관에서 택시나 오토바이, 껍데기 앰뷸런스를 타고 온 환자를 휠체어나 침대 들것으로 옮기고 병원의 여러 잡일도 한다. 전임 원장 비땅(Bitang)이 1차 교육 공고문을 보고 “이 사람들 ‘환자 운반하는 사람들’입니다”라고 말한 이유가 이런 역할 때문이었다.

 

카메룬 사뮤는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랑스 SMUR(Service Mobile d’Urgence et de Réanimation)팀처럼 의사와 간호사, 구급차 운전자가 출동하는 시스템이 아니다. 카메룬이 아직 병원 전 응급의료체계가 정상으로 작동하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카메룬 병원 전 사뮤 시스템에는 아직 빠진 이가 너무 많다. 긴급 전화번호는 죽어 있고 상황실도 없다. 구급차가 필요한 사람은 개인적으로 병원에 연락해 구급차를 요청한다.

 

요금은 누가 출동하는가에 따라, 처치 내용에 따라, 거리에 따라 다르지만 최소 1만 세파 이상을 내야 한다. 카메룬 서민들에게 1만 세파는 꽤 큰 돈이어서 응급환자도 대부분 택시로 온다. 나에게 카메룬 사뮤는 개념과 조직이 있으나 실체를 갖추지 못한 허상처럼 다가왔다.

 

그 허상을 구급대원 양성 없이 실질로 채울 순 없다. 이런 카메룬에서 제 기능을 다할 응급의료체계를 만드는 코이카 프로젝트에 현장 구급대원으로 일했던 내가 서울대병원 전문가분들과 더불어 일하고 있다. 쉽지 않지만 분명 값진 도전이다.

 

지금까지 프로젝트 현지 매니저로서 병원 전 응급의료시스템에서 미세혈관에 해당하는 현장 실무자 양성에 주안점을 두고 활동했다. 잔가지가 땅속 깊숙이 뿌리내리지 못한 나무는 크게 성장할 수 없지만 굵은 뿌리가 없는 잔가지도 생각할 수 없다.

 

이제 뿌리에서 얻은 경험을 근육 삼아 잔가지를 더 굵게 만드는 일을 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어쨌든 아프리카 카메룬의 응급의료체계를 만드는 사업에 현지 매니저로 일하는 건 멋진 일이다.

 

카메룬의 겨울은 7월이다. 카메룬에 온 지 8개월 만에 확인한 그 희망을 꺼트리지 않고 더 키우고 싶은 나는 처음으로 긴 팔 상의를 꺼내 입었다. 겨울에도 나무는 자란다.




 

유기운

서울에서 생계형 소방관으로 30년 근무했다. 현재 소방관 인생을 마무리하고 갑자기 아프리카로 튀어 카메룬 야운데에서 코이카 병원 전 응급의료체계(EMSS) 구축 프로젝트 현지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서울대병원 PMC_ 유기운 : waterfire119@naver.com

 

<본 내용은 소방 조직의 소통과 발전을 위해 베테랑 소방관 등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 2019년 5월 창간한 신개념 소방전문 월간 매거진 ‘119플러스’ 2025년 8월 호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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