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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기고] 우리나라 산업재해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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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리스크랩 연구소장(공학박사/기술사) | 기사입력 2025/09/17 [18:13]

[전문가 기고] 우리나라 산업재해의 뿌리

김훈 리스크랩 연구소장(공학박사/기술사) | 입력 : 2025/09/17 [18:13]

▲ 김훈 리스크랩 연구소장(공학박사/기술사)     ©FPN

 

우리나라 산업재해의 뿌리는 비정규직, 위험 외주화의 구조와 깊이 연관돼 있다. 고용 구조는 세계적으로도 드물게 다단계 하도급에 의존하고 있다.

 

물론 미국과 독일, 일본 등의 국가에도 하도급이 존재한다. 하지만 대부분이 1ㆍ2차 협력사 체계지 우리나라처럼 3~4차 심지어 7~8차까지 내려가진 않는다. 끝도 없이 쪼개지는 우리나라의 다단계 고용 구조는 선진국 중 유례없이 심각한 편이다. 

 

우리나라의 하도급 구조는 1960년대 산업화 초기 건설과 조선 등의 프로젝트가 늘면서 뿌리 내리기 시작했다. 이때만 해도 1~2차 정도의 수준이었다. 

 

1980년대 건설 붐이 일면서 일용직 인력시장을 통해 3~4차 하도급까지 이어지는 관행이 자리를 잡았고 1996년 12월엔 경영계의 노동시장 유연화 요구에 따라 정부가 나서 정리해고제와 파견제 등의 도입을 일방적으로 처리해 버렸다. 

 

민주노총이 26년 동안 경영계와 제도적 대화를 거부한 이유도 정부의 노동법 날치기 통과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다. 이후 1998년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하 파견법)’ 제정으로 파견근로자가 합법화됐고 같은 해 노동법 개정으로 정리해고제와 근로자 파견제가 도입되면서 비정규직 채용과 외주화가 제도화됐다. 

 

이 시기에 발생한 IMF는 이런 제도를 폭발적으로 확산시켰다. 1998년 김대중 정부는 노사정 위원회를 출범시켰지만 민주노총은 합의했던 사안이 지켜지지 않고 경영계와 정부 입맛대로 활용되는 경험을 하자 아예 경영계와의 대화를 단절해 버렸다. 

 

다단계 하도급 구조의 원인은 재벌 중심의 산업구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대기업은 이익률을 확보하려고 단가를 최대한 낮추고 직접 고용을 최소화하려 한다. 기술과 자본은 원청이 독점하고 위험과 비용은 하청으로 계속 내려보낸다. 

 

중소, 영세 업체는 원청 의존도가 높아 울며 겨자 먹기로 저가 수주를 받아야 한다. 독일과 일본은 원청이 하도급 노동자 임금과 안전까지 공동으로 책임지도록 규제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계약관리만 하는 수준이라 원청이 발을 빼버리면 그 밑에서 몇 차든 더 쪼갤 수 있다. 

 

이렇게 단계가 내려가다 보면 실제 작업자는 가장 낮은 임금과 불안전한 조건으로 일을 떠맡게 된다. 결국 현장에 투입되는 이들은 전문성이 부족한 단기 계약자나 낮은 단가를 감수해야 하는 협력사 노동자들뿐이다. 

 

당연히 숙련도와 전문성은 축적되기 어렵고 안전 교육은 부실해질 수밖에 없다. 단기간에 작업을 끝내야 하는 압박 속에서 안전은 등한시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는 곧 우리나라 산업재해 문제의 깊은 뿌리가 된다. 이런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산업재해는 줄어들지 않는다. 대기업이 비정규직과 하청 중심의 외주화를 통해 비용을 절감하는 건 오히려 생산성 악화로 이어진다. 결국 이런 구조적 불합리는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

 

첫째 숙련 축적의 단절이다. 정규직은 장기근속으로 기술과 경험을 쌓지만 단기 계약과 빈번한 이직이 일상인 하도급 구조에서는 기술과 경험이 이어지기 어렵다. 현장이 늘 새 얼굴로 채워지기 때문에 생산성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둘째, 위험과 비용 증가이다. 안전 관리가 허술한 하도급 외주 작업은 사고 위험이 크다. 하청 업체에서 인명 피해가 발생하면 원청업체까지 연대책임을 지게 되고 기업 이미지 역시 추락한다. 

 

셋째, 책임의 분산과 관리 비효율성이다. 지휘ㆍ감독 라인이 복잡해지면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책임회피 현상이 나타난다. 의사소통 지연과 중복 관리 등으로 생산 효율도 떨어진다. OECD에서도 우리나라의 낮은 생산성 원인을 하도급 구조로 지적한 바 있다.

 

넷째, 노동자의 심리 위축이다. 비정규직은 고용 불안으로 학습ㆍ혁신에 투자하지 않는다. ‘어차피 오래 다니지 않을 곳’이라는 인식은 안전 경각심과 창의적 개선 의지를 약화시킨다.

 

결국 위험 외주화는 눈앞의 비용 효율을 높일 수 있으나 안전과 숙련, 몰입, 책임 등 네 가지 축에서 구조적 생산성 손실을 키운다. 여기에 비정규직의 신분적 불안감이 겹치면서 안전은 더욱 위태로워진다. 

 

불안정한 고용 환경에서 노동자는 작업중지권을 행사하기 어렵고 위험을 피하거나 개선을 요구할 힘도 없다. 조직이 아무리 안전을 강조해도 ‘위험하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규칙이 무시돼도 눈을 감고 일한다. 원청이 위험을 외주화하면 노동자는 생존을 위해 위험을 내재화할 수밖에 없다.

 

정부는 ‘산업안전보건법’, ‘중대재해처벌법’, ‘건설안전특별법’ 등 제도를 정비하고 규제를 강화해왔지만 비정규직과 위험 외주화라는 구조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산업재해는 줄어들 수 없다. 안전 투자는 비용으로 간주되고 책임은 문서상 전가되며 피해는 하청 노동자에게 집중된다. 이런 구조 속에서 ‘산업재해 감축’은 구호에 머문다.

 

산업재해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의 문제, 나아가 구조의 문제다. 비정규직 의존을 줄이고 원청이 직접 위험 공정을 책임지도록 만드는 근본적 개혁 없이는 한국의 산업 현장은 여전히 ‘죽음의 일터’라는 오명을 벗기 힘들 것이다.

 

김훈 리스크랩 연구소장(공학박사/기술사) 

 

※ 외부 필자의 기고 및 칼럼 등은 <FPN/소방방재신문>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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