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시대에 태어나 살고 있는 많은 사람은 원래 당연한 듯 비행기를 타고 세계 곳곳 수천, 수만 ㎞를 자유롭게 날아 여행하고 있다.
그러나 기록된 수만 년의 인류 역사에서 고작 약 220여 년 전인 1799년이 돼서야 비행기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영국의 항공과학자 조지 케일러(George Cayley, 1773~1857)에 의해 비행 원리와 작용하는 힘(무게, 양력, 항력, 추력)을 이해하게 됐다.
실제 첫 비행은 그 후 약 100년이 조금 지난 1903년 라이트 형제에 의해 이뤄졌다. 여객기가 항공 운항 시스템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도 1930~40년대에 들어 안정적인 비행 성능과 각종 새로운 기능들이 고안되거나 개발되면서 가능해졌다.
사람이 타지 않고 원격 조종하는 무인항공기 개발 또한 각종 항공기 개발이 활발하던 때와 늘 함께했다. 당시 현대적 교류 시스템의 기초를 최초로 형성한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 1856~1943)는 1898년 무선으로 조종할 수 있는 선박 기술을 개발해 시연한 데 이어 1911년 무선으로 동력까지 전송하고 공급받을 수 있는 무선 전력 체계 무인항공기 이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무인항공기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비행거리 추적 후 목표물에 탄도 궤적을 그리며 날아가는 궁중 어뢰라는 이름의 Sperry Aerial Torpedo(1917)와 Kettering Aerial Torpedo(1918)가 제1차 세계대전 중 극비리에 개발되면서부터다.
항공기술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많은 공학자는 무선통신을 이용한 무인항공기를 소형으로 제작해 실험하기도 했다. 그 영향으로 1930년대 말부터 무선통신 기술을 활용한 RC(Radio Control, 무선 모형)의 초기 개척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1950~60년에 들어 상용화된 제품이 출시되면서 일반인도 접할 수 있게 됐다. 다만 습득하는 데 오래 걸릴 수밖에 없는 어려운 조종 기술과 고가의 유지 비용 그리고 아무리 소형이더라도 이동에 부담이 되는 크기로 인해 당시 일반인에겐 입문 장벽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2010년대 MEMS(Micro-Electro Mechanical System)의 기반 기술 응용 분야가 급격히 발전하고 범용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한다.
RC의 안전 비행에 필요한 주요 부품(GPS, IMU, Motor, ESC, PDB, Receiver 등)까지 초소형으로 개발돼 누구나 어렵지 않게 무선 비행 조종을 접할 수 있게 됐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관심을 두기 시작했고 ‘드론(Drone)’이라는 명칭이 유행처럼 퍼지게 됐다. 이후 드론은 수년 만에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분야에 활용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드론을 활용한 택배나 택시의 상용화가 돼 하늘에 드론이 쉽게 눈에 띌 정도로 자유롭게 날아다닐 일이 머지않았을 정도다.
이처럼 드론은 항공기 역사의 일부로 수많은 과정과 발전을 거듭해 현재 각종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앞으로 더 많은 분야에서 활용할 방안이 무한하다.
따라서 이번 연재부터는 그 일련의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항공기와 무인항공기, RC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발전했고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 재난 현장 대응 업무 등에도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적용됐는지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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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항공기의 역사(1920년대 이전)
수만 년의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하늘에 올라 머물렀던 기록은 18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류는 오랫동안 하늘을 날려는 욕망이 있었고 1783년 몽골피에(Montgolfier) 형제가 제작한 유인 열기구 운항체가 25분 동안 비행에 성공하면서 최초를 기록했다.
1870년 프랑스에서는 외젠 고다르(Eugene Godard, 1827~1890)가 공기보다 가벼운 수소를 넣은 유인 기구를 제작해 띄웠다.
이는 보불전쟁 도중 프로이센이 파리를 포위했을 당시 우편물을 외부로 날려 보내기 위해 띄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수많은 선구자는 비행 기술을 터득하기 위한 글라이더와 원하는 방향으로 비행할 수 있는 추진식 프로펠러 비행선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 용도는 사람들의 이동과 우편물 배달 그리고 전쟁에서의 유리한 정보를 취득하기 위한 정보 취득과 잠수함 정찰 용도 등으로 다양하게 확대했다.
▲ Montgolfier Hot air Balloon(1783)
인류 최초의 유인 비행 기록으로 남아있는 무동력 열기구(출처 www.britannica.combiographyMontgolfier-br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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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odard Ballon, Paris FR(1870)
공기보다 가벼운 수소를 이용한 무동력 기구(출처 www.bbc.com/news/world-australia-35583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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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mal Apparatus GR(1894)
항공술의 선구자인 오토 릴리엔탈(1848~1896)의 노말 글라이더(출처 www.onverticality.comblogotto-lilienthal-the-flying-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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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baudy no.1 ‘le jaune’ FR(1902)
세계 최초로 비행에 성공한 비행선으로 40마력 메르세데스 벤츠 엔진을 장착했다(출처 www.airships.netblogjoyeuse-fete-nation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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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 운항체(Vehicle)가 아닌 항공기(Airplane)로서 조종자가 원하는 대로 제어하면서 안정적으로 비행하는 건 19세기 말이 다 돼서야 조금씩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진보의 시작은 미국의 기계 기술자인 오빌 라이트(Orville Wright, 1871~1948)와 윌버 라이트(Wilbur Wright, 1867~1912) 형제에 의해 발명된 세계 최초의 동력 비행기 라이트 플라이어(Wright Flyer)를 빼놓을 수 없다.
이전까지 독일 항공술 선구자 오토 릴리엔탈(Otto Lilienthal, 1848~1896)의 무동력 글라이더 방식을 제외하고 증기기관과 엔진을 이용한 수많은 비행 시도는 번번이 큰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글라이더에 직렬 4기통 12마력의 수랭식 엔진을 장착하고 효율이 좋은 프로펠러를 직접 개발해 완성한 라이트 플라이어는 1903년 12월 17일 키티호크 해변에서 약 12초 동안 36.5m를 날아 동력을 이용한 비행체를 조종사가 제어할 수 있음을 최초로 증명했다.
이후 1910년대 초까지 수많은 개척자로 인해 최고 속도가 80㎞부터 110㎞대에 이르는 다양한 항공기가 개발됐다.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 등이 개발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항공기는 현재까지도 비행기의 모범이라 불리는 블레리오 11(Blériot Ⅺ)이다. 블레리오 11은 실용적인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개발하며 막대한 재산을 모은 프랑스의 루이 블레리오(Louis Charles Joseph Blériot, 1872~1936)가 항공기 개발에 관심을 두면서 탄생했다.
프랑스 항공 업계의 선구자로서 항공기 설계ㆍ제조 업체와 비행학교를 만들어 항공사업 비즈니스의 기반을 다진 루이 블레리오는 수많은 추락 사고 등 실패를 겪으며 마침내 블레리오 11을 완성했다.
1909년 37분 만에 영국 해협을 최초로 횡단하면서 2달 만에 103대를 주문받는 등 주목받기 시작했다. 1914년 무렵엔 세계 각국의 군용기로 쓰일 만큼 큰 성공을 거둔 당대 대표적인 항공기로 꼽힌다.
▲ Wright Flyer, USA(1903)
라이트 플라이어는 세계 최초의 동력 비행기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몇몇 국가에서는 자국에서 최초의 비행 성공사례가 나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 미국 코네티컷주에서는 독일 이민자 출신의 비행사 구스타프 화이트헤드(Gustave Whitehead, 1874~1927)가 라이트 형제보다 2년 앞선 1901년 최초 비행에 성공했다고 인정한 사례가 있다(출처 www.asme.orgabout-asmeengineering-historylandmarks224-wright-flyer-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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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lériot XI, FR(1909)
루이스 블레리오는 현재까지 쓰이는 수동 조이스틱과 발로 조종하는 방향타 조합을 최초로 고안해 냈고 동력을 공급받으면서 조종할 수 있는 최초의 단엽기(monoplane)를 개발했다(출처 www.militaer-wissen.debleriot-xilang=en.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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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각국에서 본격적으로 항공기술이 발전하기 시작한 건 1910년 초 유럽의 화약고라고 불리는 발칸반도 주변 정세가 불안해지면서 발칸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이 가까워질 때쯤부터다. 전쟁에서 제공권을 장악할 수 있는 다량의 군용기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군용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다.
1910년 초반까지 평균 60마력 정도에 머물던 엔진 성능이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평균 80마력 이상으로 좋아졌다. 종전된 해인 1918년엔 12기통 400마력(최고 속도 198㎞) 이상의 엔진이 개발될 정도로 각국의 항공 기초 설계 기술은 월등히 발전한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초기 군용기는 조종사 이외에도 적 표적을 사격하거나 폭탄을 투하하고 적의 동태를 정찰ㆍ감시하는 관측원의 필요에 인해 복좌식(2인승)으로 개발되는 군용기가 많았다. 더 나아가 개인 소총 대신 기관총을 탑재하기 위해 고성능의 항공 엔진 개발이 시급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였다.
▲ RAF B.E.2c, ENG(1912)
비행 속도는 느리지만 안정적이어서 약 3500대 이상 생산된 정찰용 군용기다. 그러나 관측원용 기관총이 탑재되면서부터 비교적 낮은 엔진(8기통 90마력 공랭식)성능으로 인해 최신기체에 금세 밀리기 시작했다(출처 www.modelairplanenews.comnew-premium-members-award-winning-raf-b-e-2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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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unkers J4, GR(1917)
최초의 전금속제 단엽 항공기 Junkers J1(1915)에 이어 포커 사와 협력해 만든 Junkers J4는 수랭식 6기통 200마력 벤츠 Bz.IV와 5㎜ 전금속제 강판으로 제작해 방탄 기능이 있었다(출처 hugojunkers.bplaced.netjunkers-j4-j-i.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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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이 진행될수록 공중전이 더욱 치열해짐에 따라 군용기 개발의 중점은 기동성을 강화하기 위한 단좌식(1인승) 군용 전투기로 바뀌었다. 당시 매끈한 활주로가 적은 환경에서 바다엔 이착륙이 가능한 수상기와 전쟁 중반기부터 말기까지는 수천 파운드의 폭탄을 담아 일반 군용기가 도달할 수 없는 고도에서 폭격할 수 있는 중(重)폭격기 개발까지 박차를 가했다.
특히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의 동맹국과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연합국(협상국)의 제공권 확보 쟁탈전이 치열해지면서 상대 군용기를 연구하며 기술을 따라 하거나 성능이 더욱 앞선 기종이 쏟아져 나오듯 개발됐다. 각국 주력기도 몇 개월이 지나기 무섭게 새로운 기체로 대체됐을 정도다.
당시 단좌식 기동 군용기로는 독일의 Fokker Dr.1(1917)과 Fokker D-7(1918), 영국의 Sopwith F.1 Camel(1917)과 RAF S.E.5a(1916), 프랑스의 Nieuport 17(1916)이 있다.
수상기로는 해군의 나라 영국이 최초로 해상에서 Zeppelins를 요격하기 위해 Sopwith Schneider(1914)를 개량한 Sopwith Baby(1915)와 어뢰 투하 목적으로 설계돼 최초로 군수 물자 수송선 침몰에 성공한 Shorts184(1915), 중폭격기로는 1만1460㎏의 전비중량을 견딜 수 있는 160마력 직렬 6기통 메르세데스 벤츠 엔진 장착 후 영국 런던 상공에서 맹활약해 완전무결한 전략 폭격을 구사한 Zeppelin Staaken R.IV(1915)를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 Sopwith Triplane, ENG(1916)
Sopwith Pup(1916)을 삼엽기로 개량해 기동성을 높인 군용기다. 1916~17년 당시 영국에서 주력으로 투입해 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독일에서 Fokker Dr.1을 개발하게 된 이유기도 하다(출처 swww.aresgames.eu9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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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kker Dr.1, GR(1917)
전쟁 참전국 중 가장 많은 80기의 격추 기록을 세워 붉은 남작이라고 불린 독일의 만프레드 폰 리히트호펜이 조종했던 삼엽 군용기로 빠른 비행 속도(185㎞/h)와 기동성을 갖췄다(출처 www.wingnutwings.com/ww/productdetail?product).id=3203&cat=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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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opwith Baby, ENG(1915)
영국함대의 공군부대에서 1915년 9월 첫 비행을 시도한 수상기로 정찰과 공격, 폭격을 포함한 거의 모든 해상임무에 투입됐다(출처 www.militaryfactory.com/aircraft/detail.php?aircraft_id=1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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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horts184, ENG(1915)
독일의 해상 군수 물자 수송을 저지하기 위해 개발한 수상기로 제1차 세계대전 최대 해전이었던 유틀란트 전투(1916년 5월 31일)에 투입된 유일한 수상 군용기다. 수상기는 제2차 세계대전 항공모함의 등장으로 자취를 감춘다(출처 en.wikipedia.orgwikiShort_Type_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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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Zeppelin Staaken R.IV, GR(1915)
하늘의 거인이라고 불렸다. 1917년 가을부터 1918년 늦은 봄까지 주로 런던 야간 폭격 공습 임무를 수행했다(출처 swww.aresgames.eu15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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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ckers Vimy, ENG(1918)
Vickers Vimy 복엽기는 원래 독일 도시를 폭격하기 위한 전략폭격기를 설계했지만 본격적인 생산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시작할 수 있었다. 위 사진은 1919년 11월 12일 영국 하운슬로에서 출발해 호주 다윈까지 1만7910㎞의 여정을 27일 20시간 만에 완료한 조종사 Ross Smith와 정비사 Wally Shier, Jim Bennett이다(출처 www.prints-online.com/aviation-images/vickers-vimy-1839753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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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yan NYP(spirit of st louis) USA
1927년 5월 20일 찰스 린드버그는 뉴욕 롱아일랜드 루즈벨트(Roosevelt)비행장부터 프랑스 르부르제(Le Bourget) 공항까지 Ryan NYP를 타고 5794㎞를 무착륙 단독 비행한 최초의 조종사이면서 대서양을 건넌 67번째 사람이다. 항공 역사에 영웅이 된 그는 미국과 영국, 프랑스에 훈장을 받았고 레이먼드 오티그라는 호텔 재벌에게 2만5천달러의 후원 상금을 받았다(출처 medium.com/the-ascent/not-sure-ask-yourself-what-charles-lindbergh-would-do-efc4f5adcc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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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각국에서는 전쟁 경험을 통한 효율적인 군용기 개발을 멈추지 않았다.
특히 미국과 영국은 기동성이 좋은 복엽기를 선호했고 미래 국방 전략과 전술에 대비하기 위해 군수품과 병력 수송에 특화된 군용기 등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신형에 밀려난 군용기들은 우편기와 곡예기로 전환ㆍ개량해 활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 외 다방면으로 항공기 사업은 대중에게 관심이 뜨거웠다.
특히 영국의 조종사 존 알콕(John W. Alcock)과 항법사 아서 브라운(Arthur W. Brown)이 1919년 목숨을 걸고 도전한 캐나다 뉴파운드랜드(Newfoundland)의 세인트존스(St.John’s)와 아일랜드의 크리프덴(Clifden) 간 3042.8㎞ 대서양 횡단이 무착륙으로 16시간 12분 만에 성공하면서 장거리 체공 기록 도전이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항공기술 관련 비행 속도 등 각종 신기록 대회까지 개최되며 항공 분야 인프라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게 된다.
서울 서대문소방서_ 허창식 : hcs119@seoul.go.kr
<본 내용은 소방 조직의 소통과 발전을 위해 베테랑 소방관 등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 2019년 5월 창간한 신개념 소방전문 월간 매거진 ‘119플러스’ 2022년 5월 호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