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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간의 세월호 이야기- 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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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119특수구조단 한정민 | 기사입력 2024/02/01 [13:30]

6개월간의 세월호 이야기- Ⅵ

서울119특수구조단 한정민 | 입력 : 2024/02/01 [13:30]

다이빙 벨

다이빙 벨은 4월 25일 기상악화로 철수한 후 5일 만에 다시 현장에 나타났다. 실종자 가족 입장에서는 지푸라기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을 거다. 누군가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고 자기 가족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면 어떤 가족이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있겠는가. 

 

▲ [사진 1] 세월호 당시 투입된 다이빙 벨 테스트(출처 www.nocutnews.co.kr/news/4017188)

 

재투입 당시 다행히 기상이 도와줘서 다이빙 벨의 바지선도 앵커링이 잘 됐다. 알파 잠수의 잠수사는 리베로 호에서 작업하던 사람인데 어떤 연유로 인해 알파 잠수에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당시 리베로 호에서 작업하던 민간 잠수사들이 알파 잠수에서 다이빙 벨을 사용하면 장시간 구조 작업을 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한 불신이 컸다. 그래서 같이 작업하던 잠수사가 알파 잠수로 간 것에 대해 의외감을 나타냈다.

 

다이빙 벨을 이용한 실종자 수색 작업은 원활하게 재개됐지만 단 한명의 실종자도 발견하지 못하고 다시 팽목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다이빙 벨을 이용해 실종자를 수색했던 잠수사는 감압병에 걸려 해군 재압 챔버에서 치료를 받던 중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됐다. 

 

나를 포함한 현장에 있던 모든 다이버들이 예상했듯 다이빙 벨은 실종자 수색을 위한 획기적인 방법이 될 수 없었다. 이런 모든 상황을 실종자 가족 대표들도 봤기에 그들 또한 적잖은 실망감과 배신감이 분노로 표출됐다.

 

다이빙 벨이 실제로 현장에 투입되기 전 언론에서는 20시간 연속 작업이 가능하고 현재 하는 구조 작업 방식보다 더 효율성이 있는데 일부러 투입하지 않고 있다는 등의 자극적인 내용을 보도했다. 알파 잠수 측에서는 절반의 성공이라 했지만 내가 봤을 땐 완벽한 실패다. 

 

과연 이런 부분을 나만 느꼈던 걸까. 알파 잠수 측에서도 철수하면서 20시간 수색은 “처음부터 할 수 없었다”고 인정했다. 이런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은 제삼자인 나와 해경, 민간 잠수사가 각각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뻔히 안되는 작업인 줄 알면서도 왜 투입했겠느냐”, 민간 잠수사들은 “어떤 이익을 얻기 위해 알파 잠수 측에서 고집을 피우는지 모르겠다”, 해경은 “안 되는 걸 알지만 언론과 실종자 가족의 압박에 견디기 힘들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할 거다. 

 

이때 언론 대응, 실종자 가족과의 소통이 중요함을 다시 깨달았다. 대형 사고일수록 정보를 무조건 제한하기보다 알릴 수 있는 정보는 투명하게 공개돼야 한다.

 

태국 유소년 축구팀 동굴 조난 사건처럼 다른 가족이 동요하고 괴로울까 봐 먼저 구조한 소년들의 정보를 알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처럼 추측성 보도를 하지 않은 건 본받아야 할 사례다. 이렇게 다이빙 벨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막을 내렸다. 

 

사람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경향을 심리학 용어로 ‘확증 편향’이라고 한다. ‘확증 편향’을 갖는 사람들은 이런 해프닝이 벌어졌는데도 음모론을 내세운다.

 

첫 민간 잠수사의 죽음

진도군청에서 해양수산부 모 국장의 주재로 민ㆍ관 구조 대책 합동회의가 있었다. 이때 해양수산부 국장은 “조명탄 한 발 가격이 얼마인 줄 아십니까? 하루에 몇 억씩 쏟아붓고 있는데 가용한 민간 잠수사들을 돈에 구애받지 말고 투입 시켜주세요”라고 했다. 

 

참고로 9월 초까지 국회 국방위 자료 중 기관별 조명탄 소모 현황을 보면 조명탄이 1만3203발(이 중 882발은 불발)이고 사용 예산만 198억600만원이다. 

 

그래서 해경은 민간 잠수사를 추가로 투입시켜야 했다. 이 민간 잠수사들은 “처음에 투입됐던 잠수사들과 손발을 맞춰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사전에 해경에서는 잠수사를 추가 모집할 때 기존 잠수사들에게 자문을 얻지 않고 인원을 선발한 것 같았다.

 

▲ [사진 2] 표면 공급 장비를 이용한 수색 작업을 하는 민간 잠수사

 

5월 6일,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새벽 정조 시간에 맞춰 수색 작업이 재개됐고 민간 잠수팀이 준비하는 동안 소방 잠수팀도 차례가 돼 장비를 착용하고 잠수할 준비를 끝냈다.

 

민간 잠수사가 입수한 지 5분 만에 통신이 끊겼고 바지 선상은 잠시 정적이 흘렀다. 민간 잠수 감독관은 통신사에게 다시 통신할 것을 지시했는데 통신사가 “다이버, 여기 탑사다”라고 몇 차례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곧바로 대기하던 소방 잠수팀에게 민간 잠수사를 구조하라는 임무가 떨어졌고 소방 팀은 곧바로 입수했다. 서울 직원으로 구성된 소방 팀은 잠수 경험이 풍부해 임무를 잘 수행하리라 믿었지만 그래도 물 밖으로 안전하게 나올 때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 [사진 3] 당시 구조 활동했던 대원이 상황을 그린 그림

 

입수한 지 얼마지나지 않아 민간 잠수사를 구조하고 인양하는데 민간 잠수사의 얼굴에 있어야 할 풀페이스 마스크가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의식과 호흡이 없고 맥박이 뛰지 않았다. CPR을 실시하면서 긴급하게 헬기를 이용해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결국 숨졌다. 

 

구조 활동을 한 대원들의 몸 상태를 확인하고 구조 상황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했다. 다행히 경험이 많은 대원들은 아무 이상이 없어 해경 경비함으로 복귀했다. 그런데 저녁에 느닷없이 해경 감독관에게 휴대전화로 전화가 왔다.

 

“한 팀장, 소방 잠수 대원들 어떻게 선발한 거야!”

 

 


독자들과 수난구조에 관한 다양한 얘기를 나누고 싶다. 사건ㆍ사례 위주로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자 한다. 만일 수난구조 방법에 관해 궁금한 점이 있다면 e-mail : sdvteam@naver.com facebook : facebook.com/chongmin.han로 연락하면 된다.

 

서울119특수구조단_ 한정민

 

<본 내용은 소방 조직의 소통과 발전을 위해 베테랑 소방관 등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 2019년 5월 창간한 신개념 소방전문 월간 매거진 ‘119플러스’ 2024년 2월 호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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