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는 연간 4만여 건이 넘게 발생하지만 모두 원인이 시원하게 밝혀지는 건 아니다. 특히 자연적 요인이나 화학적 요인의 경우 현장에서 화재 원인을 규명하기란 녹록지 않다. 그러나 원인 없는 화재는 없다. 다만 못 찾 을 뿐이다.
예를 들어 거리를 걷다가 침샘이 넘쳐 입안에 침이 고여도 거리에 침을 뱉으면 안 된다고 배웠고 알고 있음에도 무심코 “퉤”하고 뱉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혹은 차량을 운전할 때 창문을 열고 흡연한 후 담뱃불을 무심코 차 창밖으로 버리는 행위 등은 나만 편하면 된다는 자기 편의주의에서 오는 병폐다.
어느 해 봄, 파지를 재활용하는 야적장에서 발생한 화재다. 화재는 직원들이 퇴근한 후 오후 7시께 발생했는데 화재 초기부터 인지하지 못한 탓에 대형 화재로 확대됐다. 목격자는 화재 발생 업체 직원으로 화재를 인지하고 뛰는 모습이 인근에 주차된 차량 블랙박스에 촬영됐다. 또 파지를 쌓아놓은 상부에서 연기가 목격되고 불꽃이 희미하게 식별됐다.
화재 시 진압보다 신고 먼저! 대부분 야적장에서 불이 나면 연소는 급격하게 확대된다. 불을 끄려고 시도하다 보면 소방당국에 신고하는 시간도 늦어진다. 이 작업장도 불을 끄려 먼저 움직인 후 화재가 커지고 나서 신고한 경우다. 인근 작업장에 설치된 폐쇄회로를 보니 촬영된 영상은 인근 ○○엔지니어링 창고 우측 상단으로 검은 연기가 분출하는 게 보일 뿐 발화지점은 확인할 수 없었다.
현장을 둘러보라! ○○리사이클링 작업장 내 목격자 이 씨는 “전봇대 주변 종이가 언덕처럼 쌓여 있었는데 전봇대 밑에서부터 불길이 곧게 올라왔다”고 했다. 이 씨가 목격한 형상은 검은 연기가 아닌 뽀얀 연기다. 연기가 옆으로 퍼진 상태가 아닌 위로 곧장 올라오는 형태였다.
고압 호스를 끌어다 불이 난 곳으로 물을 뿌리고 화재를 진압하려 했으나 불길이 잡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바람을 타고 열기와 함께 회오리치듯 옆으로 번져갔다고 진술했다.
첫째, 사람이 목격한 각 위치를 확인하기로 했다. 직접적인 발화지점을 정확히 확인할 수 없지만 목격자 위치에서 본 형상과 빛을 추적해 발화지점을 추정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숨은 목격자를 찾아라! 둘째, CCTV가 설치된 지점에서 연기와 불꽃을 확인한 후 블랙박스를 확인해 발화지점을 축소하는 방법을 택했다.
연소 형태와 현장을 확인하라!
어느 업체에서 최초 화염이 시작됐는지 찾기 위해 CCTV로 업체 경계와 최초 화염이 시작된 지점을 [사진 7]과 같이 확인했다. 그 결과 발화지점은 ○○리사이클링 점유공간으로 파악했다.
업체와 상당히 떨어진 지점에 배전반이 설치돼 있었던 건 토지에 관한 지분이나 소유부분의 경계 지점을, 일부는 경계 지점을 확인하는 지표가 되기도 했다. 따라서 논란의 여지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리사이클링 점유공간 발화지점에는 발화 원인이 없다고 주장했다. ○○싱크대는 화재 당시 작업을 모두 종료하고 퇴근한 상태로 사용자가 없었다며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경계지점이 하천을 기준으로 [사진 10] 좌측은 ○○싱크대, 우측은 ○○리사이클링 점유공간으로 확인됐다. 전봇대가 위치한 지점에 하천이 흐르고 있었고 하천에 전봇대가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사진 10]에서는 마치 ○○리사이클링 점유공간처럼 식별됐다.
○○싱크대 전봇대에서 ○○리사이클링, ○○자원 사이에 조그만 하천이 있었으나 물이 거의 흐르지 않아 적치물에 의해 서로의 경계가 모호한 상태였다. 또 잔화 정리를 위해 굴착기로 정리하던 중 탄화물과 잔류물 위치가 옮겨지며 경계 부분이 가려진 상태라 점유공간의 경계를 우선 확인했다. 이렇게 경계를 확인함으로써 발화지점이 명확해질 수 있다.
전봇대를 확인하니 하단부터 그을린 형태가 관찰됐다. 최초 목격 당시 전봇대는 반 정도 파지에 가려져 하단은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굴착기로 주변을 제거하니 하단부터 탄화하고 그을린 형태였으며 측면에 있던 나무에 탄화방향이 선명하게 잔류해 있었다.
가연물에 따라 연소 방향성이 다르겠지만 이 현장의 경우 가연물의 연소 특성이 같아 방향성을 신뢰할 수 있다. [사진 15]에는 좌측에서 우측으로 진행한 패턴이 식별된다. 나무에 잔류한 흔적에서도 화염 진행 방향을 추정할 수 있었다. 전봇대 좌측에서 우측으로 하단에서 상단으로 화염전파 형태가 식별됐다.
○○리사이클링과 ○○자원, ○○엔지니어링, 차량 블랙박스 등의 위치를 확인하고 비추고 있는 방향을 맵핑했다.
또 다른 목격자인 이 씨는 “○○리사이클링 야적장에서 전봇대 주변 종이가 언덕처럼 쌓여 있는 곳 밑에서부터 불길이 올라왔다”고 말했다. 이 씨의 차량 블랙박스와 ○○리사이클링, ○○자원, ○○엔지니어링의 CCTV를 모두 확인한바 발화지점은 맵핑한 결과와 일치했다.
주택이나 내화조 건축물이 있는 공간이라면 빛의 발산 각도와 그림자 크기, 구조물 등을 통해 발화지점 역 추적이 가능하다. 빛이 비치는 광원에 따라 다르지만 섬광이 있는지, 불꽃이 맑게 보이는지, 뿌옇게 보이는지, 중간 구조물이 있는지 등을 종합해 발화지점을 추정할 수 있다.
발화지점이 특정되고 발화 원인을 발굴한 후 시간이 한참 지났다. 집중 탄화한 지점에 아무것도 없이 심부 화재가 있었다. 심부화재는 일반적으로 담배꽁초나 무염 화원에서 발생한다. 이 화재현장에서 담배꽁초를 고의로 던졌다 하더라도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파지 속으로 약 10m 정도 타들어 간다는 건 이해되지 않았다.
크라프트지는 화학펄프의 일종으로 크라프트펄프를 주원료로 하는 포장용지인데 어떻게 기름이 침습된 걸까? 하는 의문점이 있었다. 심부에서 크라프트지가 자연발화할 여지가 있는 걸까? 자연발화 한다면 어떤 작용 때문에 발화한 걸까? 점점 의문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작업을 수없이 반복했을 텐데 그동안 문제는 없었나? 하는 의문도 있었다.
가능성 있는 원인을 추론하라! 태양에 의한 발화 가능성은 없지만 기상 상황을 살펴보니 화학적 요인 중 자연발화로 추정됐다. 화재 신고 시간이 오후 6시 40분께고 화재 당일 ○○관측소 기준 최고기온은 19.2℃, 상대습도 53.8%, 일조량 10.2(hr), 풍향 서북서 4.6m/s, 지면 온도 13.7℃였다.
△△관측소 온도를 시간대별로 확인해 보면 오후 2시 16.8℃, 오후 3시 16.6℃, 오후 4시 15.6℃, 오후 5시 14.9℃로 확인됐다. □□관측소 온도는 오후 2시 14.9℃, 오후 3시 15.1℃, 오후 4시 14.7℃, 오후 5시 14.9℃였다.
목격자 이 씨는 전봇대를 중심으로 불길이 아래에서 위로 곧게 솟아 올라왔다고 진술했다. 화재가 발생한 지점에 있던 크라프트지는 포스코에서 생산되는 철재 또는 비철금속 롤 사이에 간지로 사용하는 종이다. 그 크라프트지를 수거해 다량 쌓아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철재나 비철금속의 마모나 녹을 방지하고자 FX 50-K 라는 광유를 사용해 크라프트지에 광유가 침습된 걸 확인했다. 물질안전보건자료를 살펴보면 FX 50-K는 인화점이 158℃다. 종이를 야적해 놓은 곳에서 점화원 없이 발화는 불가능할 것으로 사료됐다.
그러나 크라프트지가 롤에 말려있었고 상대적으로 최고 기온의 관측이 19.2℃인 걸 고려할 때 축열 됐을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전봇대 하단에서 불길이 곧게 올라왔다는 이 씨의 진술도 있었기 때문이다.
발화지점을 발굴한바 화재는 크라프트지가 쌓여 있는 외피에서 발생한 게 아니라 크라프트지 내부에서 발화된 것으로 추정됐다. 물질안전보건자료 내용 중 산화 열에 취약하고 적절한 환기를 해야 하는 것으로 확인됐는데 크라프트지를 야적해 놓은 상태는 환기가 쉽지 않았을 거로 여겨졌다.
○○리사이클링 박 씨에게 전화로 크라프트지는 포스코에서 납품된 스테인리스강(stainless steel)과 비철금속 간지라는 걸 확인했다.
S-Oil 기술진에게도 자문을 구했다. FX 50-K는 광유이며 롤링 기름이라 불리고 통상적으로 윤활유로 사용하는 GKS라고 했다. 롤링 기름과 크라프트지 그리고 기온 19℃, 태양열 수렴에 의한 축열 등 자연발화 가능성에 조심스럽게 무게가 실렸다.
수소 처리된 경질 파라핀 정제유는 옥외 또는 환기가 잘 되는 곳에서 취급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광유인 롤링 오일의 성분을 각각 살펴보면 태양열에 의한 축열 시 화학반응이나 발열될 가능성이 있다.
최종적으로 종합해 확인하라! 화재는 폐지를 쌓아놓은 야적장에서 발생했다. 최초 목격자인 이 씨는 언덕처럼 종이를 쌓아놓은 윗부분에서 화염을 목격했고 불길은 하단에서 곧게 올라왔다고 진술했다.
[사진 4]와 같이 불꽃이 확인되는 점과 일치하는 점, ○○리사이클링 내 주차된 차량 블랙박스 영상과 ○○자원, ○○리사이클링, ○○엔지니어링의 CCTV 영상 등을 종합해 지도에 맵핑한 결과로 [사진 18, 19]와 같이 동선이 겹치는 부분을 발화지점으로 추정했다.
현장을 확인해 보니 발화지점으로 추정되는 부분에 잔화 정리를 위해 굴착기와 집게 차로 뒤집어 가며 주수해 발화지점의 형체는 확인이 불가했다. 하지만 맵핑에 의해 추정된 발화지점과 주변에 탄화 잔류한 나무에 나타난 방향성 등을 고려할 때 발화지점이 확인되고 발화부 중심부 하단부터 연소한 흔적이 [사진 15]와 같이 나타나 있어 하단부에서 발화돼 직상부로 진행된 것으로 사료된다.
[사진 16]과 같이 나무가 한 방향으로 탄화된 건 수열 방향을 의미한다. 따라서 주변 가연물 조건은 동일한 것으로 조사됐다. [사진 17]에서 바라본 방향과 전봇대 하단부의 탄화형태가 일치하는 것으로 식별됐다. 중심부에 특정되는 발화요인은 식별되지 않으나 크라프트지에 침습돼 있던 광유2) 성분 때문에 화학적 요인이나 자연적 요인을 배제할 수 없었다.
서울 ○○관측소와 △△관측소, □□관측소에서 관측된 화재 당일 온도변화를 살펴볼 때 직접 수렴되는 태양열은 없었을 것으로 사료됐다. 하지만 낮에 주변 장애물 없이 직접적으로 태양열을 받아 축열 됐을 개연성과 당시 지면의 온도가 13.7℃로 확인돼 낮부터 태양열이 수렴되면서 장시간 축열에 의해 광유가 반응한 자연발화 화재로 추정했다.
1) 화학펄프의 일종인 미표백 크라프트펄프를 주원료로 하는 포장용지.
경기 부천소방서_ 이종인
<본 내용은 소방 조직의 소통과 발전을 위해 베테랑 소방관 등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 2019년 5월 창간한 신개념 소방전문 월간 매거진 ‘119플러스’ 2020년 11월 호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FPN(소방방재신문사ㆍ119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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