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119] “실패가 두려워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인터뷰] 남극에서 돌아온 이성철 김제소방서 교동119안전센터 소방장
지난 2023년 1월 5일 9차 월동연구대 소속이던 이성철 전북 김제소방서 소방장이 임무를 마치고 귀국했다. 2021년 10월에 파견된 후 약 14개월 만에 한국 땅을 다시 밟은 것.
16개의 건물과 24개의 관측설비를 갖춘 장보고과학기지는 1988년 건설된 세종과학기지에 이은 우리나라의 두 번째 남극 연구기지다. 2014년 2월 준공돼 과학의 새로운 영토를 넓히는 거점으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기존 세종과학기지에선 하기 어려웠던 고층대기학과 빙하학 등 순수과학 연구는 물론 남극의 미생물과 천연물질 등을 기반으로 신물질ㆍ의약품을 개발하기 위한 다양한 응용 분야 연구가 진행된다.
장보고과학기지는 변화무쌍한 남극의 날씨 탓에 예상치 못한 위험이 발생하곤 한다. 하루는 연구원들이 해빙 연구을 위해 기지 밖으로 나갔는데 영하 30℃가 넘는 칼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날씨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월동연구대장은 이성철 소방장에게 연구원들을 기지로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 소방장은 설상차를 몰고 연구원들을 찾아 나섰다.
“다행히 출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연구원들을 발견했는데 설상차에 태우면서부터 문제가 시작됐어요. 우려했던 것처럼 날씨가 급격하게 악화하면서 강한 바람과 함께 눈이 날리며 시야가 상실되는 화이트 아웃(white out)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5m 앞이 채 보이지 않는 데다가 사람이 날아갈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자칫 길을 잃으면 표면이 눈으로 덮인 히든 크레바스(hidden crevasse)로 설상차가 빠져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아찔한 상황이었다. 기지 내 통신실에선 다급한 무전을 계속해서 보내왔다.
“많이 당혹스러웠지만 정신을 차리려고 부단히 애썼어요. 제가 패닉에 빠진다면 연구원들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을 거란 직감이 들었죠. 다행히 모두 무사히 기지로 복귀할 수 있었고 남극의 무서움을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소방을 대표해 남극에서 임무를 수행한 이 소방장은 처음부터 소방공무원을 꿈꾸진 않았다. 타인을 돕는 일에 관심이 많던 그는 대학교에서 간호학을 전공하며 전문 의료인으로서의 꿈을 키웠다. 졸업 후엔 약 5년간 대학병원 중환자실 등에서 간호사로 근무했다.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다 보니 구급활동일지를 접하는 일이 많았어요. 응급처치 상황이 구체적으로 적혀있어 현장의 긴박함과 구급대원들의 활약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었죠. 그러면서 자연스레 구급대원이 돼야겠다고 결심했던 것 같아요. 특히 응급환자들에게 가장 처음으로 접촉해 직접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습니다”
이 소방장은 구급대원이 되기 위해 업무 시간엔 환자를 돌보고 퇴근 후엔 채용 시험을 준비했다. 고된 근무로 몸과 마음이 지쳐 공부를 그만두고 싶은 순간도 많았지만 결코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실패가 두려워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최선을 다한다면 겁먹을 필요가 없죠. 지금까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도전해 왔고 악착같이 버텨냈어요”
2013년 세종소방본부에서 구급대원으로 공직을 시작한 이 소방장은 2016년에 농사를 짓는 부모님을 가까이에서 돕고 싶은 마음에 시도 인사교류를 통해 전북소방본부로 소속을 옮겼다.
그러던 중 2020년 남극 파견 공고를 보고 지원서를 냈다. 하지만 높은 경쟁률 탓에 한 차례 탈락하는 고배를 마셔야 했다.
“선발에서 떨어졌지만 낙심하거나 포기하진 않았어요. 오히려 제 역량을 돌아보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았죠. 선박 조종 관련 자격증이 없어 떨어진 걸 알게 돼 추가로 동력수상레저기조종면허를 취득했어요”
이 소방장은 결국 2021년 남극 장보고과학기지 9차 월동연구대 육상안전 담당 대원 파견 근무자로 최종 선발됐다. 이후 해양수산연구원에서 9월 13일부터 일주일간 극지 적응 훈련과 소양 교육, 보트ㆍ감압챔버 교육 등을 받고 10월 10일 남극으로 향했다.
“처음 마주한 남극은 정말 눈부신 데다가 맑고 시원했어요. 특히 은하수가 펼쳐지던 기지에서의 첫날밤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설레는 마음 한편으론 월동연구대원 18명의 안전이 제게 달렸다는 막중한 책임감에 잠을 설치기도 했죠. 이들을 무사히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돌려보내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남극에서 이 소방장의 주된 임무는 연구원들이 안전하게 연구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기지 시설물의 파손 등으로 인한 사고를 예방ㆍ관리하는 일이었다. 주기적으로 소방 훈련과 기지 특성에 맞춰 기획한 안전 교육도 주재했다.
“대장님 이하 월동연구대원 전원은 자기 일이 아니더라도 유기적으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함께 임무를 수행했어요. 극한의 환경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한 팀으로 근무해서인지 관계가 무척 끈끈했죠. 특히 동상과 고지혈증 치료제 발견을 위해 연구원들과 2m가 넘는 두께의 해빙을 뚫고 남극 대구를 잡던 게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남극에서 근무하던 이 소방장을 가장 힘들게 했던 건 매서운 남극의 환경도, 고된 업무로 인한 체력 소모도 아닌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출발 전부터 각오했던 어려움이었지만 실제로 겪으니 훨씬 더 크게 다가왔다.
“통신 환경으로 인해 비록 저화질이었지만 일과 외 시간엔 가족과 언제든 영상통화를 할 수 있었어요.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어린 두 아들, 사랑하는 아내, 부모님 등과 통화하며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어 참 다행이었죠. 제게 가족은 모든 걸 가능하게 만드는 원동력이거든요”
이 소방장의 파견 기간은 처음 계획된 1년을 넘어 약 14개월까지 늘어났다. 2022년 발생한 통가 해저 화산 폭발의 여파와 강풍 등으로 인해 여러 차례 해빙이 깨지면서 해빙이 비행기 활주로를 만들 수 있는 최소 기준인 157㎝ 두께로 얼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임무를 완수하고 귀국한 그는 약 열흘간 보고서 정리 기간을 가진 후 2023년 1월 16일 김제소방서 교동119안전센터로 발령받았다. 다시 구급대원으로서 시민의 소중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이 소방장. 남극 장보고과학기지 육상안전의 바통은 10차 월동연구대로 파견된 파주소방서 소속 김성한 소방장이 이어받았다.
“남극에서의 14개월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 있는 경험이었습니다. 한 명의 소방공무원으로서, 한 명의 인간으로서 한 층 더 성장하게 된 것 같아요. 가족과 동료들의 이해와 지지, 응원이 없었다면 해내지 못했을 거예요. 앞으로도 초심을 잃지 않고 새로운 분야에 대한 도전과 자기 개발을 계속해 ‘안전 전문가’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은 소방공무원이 되겠습니다”
김태윤 기자 tyry9798@fpn119.co.kr
<본 내용은 소방 조직의 소통과 발전을 위해 베테랑 소방관 등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 2019년 5월 창간한 신개념 소방전문 월간 매거진 ‘119플러스’ 2023년 3월 호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FPN(소방방재신문사ㆍ119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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