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파인만은 양자역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게 될 내용은 대학원에서 3~4년 정도 공부한 박사과정 학생들에게 강의하던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은 결코 이걸 이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걸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양자역학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너무 상식적이지 못해서다. 양자역학은 기존의 이론과는 전혀 다른 터무니없는 방법으로 자연을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 터무니없는 이론은 사실이다. 실험과 완벽하게 일치하고 수학적으로도 아름답게 설명되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양자역학을 공부하기 전에 우리가 속한 자연이 우리가 도저히 알 수 없는 터무니없는 방식으로 이 세상을 기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흔히들 우리가 무언가를 알려면 먼저 개념을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개념을 이해하지 않고는 그 본질에 접근할 수 없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개념이란 무엇인가? 개념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개개의 사물로부터 비본질적인 건 버리고 본질적인 것만을 추출해내는 사유의 한 형태다. 칸트는 개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감각적 직관이 없는 개념은 공허하고 개념이 없는 감각적 직관은 맹목적이다” 개념의 속성이 감각적 직관으로부터 비롯된다는 뜻이다.
개념은 세상을 보는 창문이다. 인간은 언어를 갖게 되면서 개념이 생겼고 개념이 폭발하면서 문명이 탄생했다. 개념은 언어로부터 생겨나 언어로 표현된다.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개념은 개념이라고 할 수 없다.
인간은 개념을 사용해 어떠한 사물과 그 과정의 본질적인 특징을 포착한다. 언어는 그러한 개념을 실어 나른다. 그러한 개념은 인간의 감각에서 나온다.
감각은 외부에서 정보를 받아들이고 지각은 감각기관을 통해 받아들인 정보를 식별한 후 해석한다. 인간의 감각은 3차원 세계를 2차원 평면으로 해석한다.
시각은 3차원의 세계가 2차원의 세계인 망막에 투영된 결과다. 인간의 감각기관 중 가장 신뢰도가 높은 건 청각과 시각, 촉각이다. 청각의 경우 환청이 들리면 바로 병원으로 가야 한다.
하지만 시각의 경우 착시는 정상인도 수시로 겪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촉각은 이보다 더욱 심해 촉각의 신뢰도는 매우 낮아 환영과 환상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청각과 시각은 뇌의 작용이라고 할 수 있지만 확장된 마음 가설(hypothesis of extended mind)에 의하면 촉각은 단순히 뇌뿐만 아니라 뇌와 몸 그리고 환경의 작용이다.
감각기관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인간은 실재하는 물리적인 세계와 개인이 지각하는 세계를 서로 다르게 볼 수 있다. 인간은 지각한 걸 기억하고 기억한 것만을 지각한다.
기억하지 못하는 건 지각하지 못한다고도 할 수 있다. 문제는 바로 여기부터 시작된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지각할 수 없다면 그 인식 작용의 결과인 개념이 온전할 리 없다.
개념이라는 사전적 의미가 비본질적인 건 버리고 본질적인 것만을 추출해내는 거라면 본질이란 무엇인가? 우린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본질은 존재하는 대상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고안해낸 개념이지만 사실 존재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거라고도 할 수 있다.
인간은 이러한 방법을 통해 생각을 진화시켜 왔다. 따라서 개념은 모든 가정(if)을 필요로 한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기억이 새로운 현상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면 가정을 바꿔야 하며 그로 인해 그동안 알고 있던 개념이 깨진다.
사실 사물의 본질이라는 것도 허구다. 오랫동안 철학사에 있어 실존이 먼저냐, 본질이 먼저냐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논쟁거리였다. 사르트르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말했다.
쉽게 말해 쓸데없는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현재에만 충실하라는 뜻인데 존재의 본질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의 말은 당연히 옳다. 그 자명한 진리가 오랫동안 논쟁거리가 돼왔다는 것 그 자체가 인간의 무지를 드러낸 일이다.
흔히 말하는 본질이 하나의 결정적인 물리적 성질을 갖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물고기가 어항 속에서 공기 방울을 내뱉고 있다. 이때 공기 방울의 본질은 무엇인가? 인간이 보기에 공기 방울은 물의 부재다. 물이 없다는 게 공기 방울이다.
하지만 금붕어의 입장에서는 물의 부재가 아니라 공기 방울의 존재다. 이처럼 본질의 물리적 성질도 관찰자가 누구냐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칸트는 그의 책 선험적 감성론에서 “시간과 공간이란 경험에서 끌려 나온 경험적 개념이 아니다. 모든 직관의 근저에 놓인 필연적 표상이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틀렸다. 칸트는 뉴턴 역학의 중요성과 엄청난 파급력을 인지한 철학자였다. 뉴턴이 프린키피아를 출판했을 때 데카르트를 따르던 학자들에 의해 엄청난 비난을 받았지만 물리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칸트는 뉴턴 역학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그래서 칸트의 선험적 감성론은 뉴턴역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뉴턴 역학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입자물리학이라는 현대물리학에 들어오면서 깨졌고 칸트의 선험적 감성론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해 철저하게 부정되고 말았다.
현대물리학에 의하면 시간과 공간은 철저하게 경험적 개념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시공간은 절대적인 게 아니라 관측자에 따라 달라진다.
관찰자에 따라 세계는 항상 변화한다. 시속 100㎞로 달려가는 기차에서 내가 물을 마시고 있다. 내게 물은 정지한 것처럼 보이지만 밖에서 보는 사람은 시속 100㎞로 달리고 있는 물을 보게 된다.
중세인들이 천동설을 믿었듯이 지구에 사는 우리는 정지된 것 같은 지구를 보고 있다. 하지만 지구 밖에서 보면 지구는 초속 465m로 자전한다. 공전 속도는 이보다 더 어마어마해 태양 주위를 초속 30㎞로 움직인다. 이 속도는 음속의 87배로 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속도다.
그렇다면 태양계는 정지하고 있을까? 우리의 태양계가 속해있는 은하는 정지해 있을까? 그렇지 않다.
이처럼 모든 사물의 운동은 누가 관측하느냐에 따라서 운동하거나, 정지하거나이다. 그 운동이라는 물리적 성질도 그 상태에 따라 본질이 달라진다.
빛은 질량이 없다. 따라서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강력한 중력장에서는 빛도 휜다. 질량이 있는 물체를 끌어들이는 중력이 질량이 없는 빛을 끌어당긴다?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빛이 휘는 게 아니다. 빛은 직진하지만 빛이 지나가는 공간이 휘는 거다. 휜 공간을 직진하는 빛이 휘는 건 당연하다.
시간은 어떤가. 시간도 관찰자의 주관성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시간이 흘러간다는 건 환상이다. 시간은 흘러가지 않는다. 과거를 볼 수 없다고 하지만 과거는 현재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가 보는 태양은 8분 20초 전의 태양이고 우리가 보는 안드로메다에서 오는 빛은 250만년 전의 빛이다.
우주에서의 현재는 아무 의미가 없다. 이론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에 의하면 시간과 인과율은 동의어다. 시간은 인간의 모호한 인식의 결과일 뿐이다.
이처럼 우리가 속한 세계(시공간)는 항상 변하고 있다. 시간이 바뀌는 걸 세(世), 공간이 바뀌는 걸 계(界)라고 한다. 신들이 사는 세계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모두 고정돼 있다.
하지만 공간이 고정되고 시간이 변할 수도 있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면 공간은 고정돼 있지만 시간이 변화한다. 앉아서 공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시간은 고정돼 있는데 공간이 변할 수 있을까?
내가 동시에 집에서도 존재하고 회사에서도 존재할 순 없다. 하지만 그게 가능한 것도 있다. 파동이다. 입자는 동시에 두 곳에 있을 수 없지만 파동은 동시에 무수히 많은 공간에 존재할 수 있다.
입자로 구성된 나는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할 순 없지만 파동의 성질을 갖는 소리는 동시에 여러 공간으로 퍼져나간다. 파동은 에너지의 전달이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은 직관의 근저에 있는 필연적 표상이 아니라 관찰자의 상태에 따라 바뀌는 경험적 개념이다. 시간과 공간은 우리가 거시세계에서 느끼고 경험하는 데서 출발한다. 따라서 모든 사물의 물리적인 성질은 이미 결정된 게 아니라 관측하는 자와 방법에 따라 달라진다.
칸트는 인간은 경험의 도움 없이도 경험에 독립해 참임을 확증할 수 있는 지식이 있는데 그걸 경험과 구분되는 선험이라고 했다. 칸트는 시공간의 개념을 인간이라는 인식주체가 갖춘 변하지 않는 틀로 해석했지만 현대물리학이 발견한 시공간은 항상 그 기준의 틀이 변한다.
인간은 과거 수만, 수천, 수백년 동안 급격한 인식체계의 변화를 겪어왔다. 그러한 세계관의 변화는 기존의 지식과 질서를 유지하면서 변화를 시도했지만 양자역학시대가 열리면서 인간의 사고체계에 급격한 요동이 발생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갖고 있던 세계관이 실제의 세계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과학은 물론 철학에 이르기까지 지금껏 우리가 알고 있던 모든 지식에 대해 새판을 짜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갈릴레오가 과학의 문을 연 17세기 이후 고전물리학에서 이 세계는 어떤 조건이 주어지면 그게 어디로 움직일 건가를 예측할 수 있었다.
부분을 알면 전체를 알 수 있는 결정론과 환원론이 지배하는 세계였다. 현대물리학에서는 400년 동안 과학을 지배해 온 데카르트식의 주체와 객체, 관찰자와 관찰대상 사이의 구분조차도 사라진다.
현대물리학에서는 모든 물질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유기적 관계에 있으며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한다. 초기조건이 주어지면 앞으로의 결과는 이미 정해진다는 결정론이 더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과학자들은 이러한 결정론으로는 더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현상을 발견한다.
결국 결정론을 포기하고 확률론을 선택하기에 이른다. 고전물리학에서는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두 물체는 절대 서로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국소성의 원리가 지배한다. 하지만 현대물리학에서는 국소성의 원리도 더는 유효하지 않다.
거시세계에서는 중력만 관찰된다. 미시세계에서는 전자기력이 관찰된다. 극미세계에서는 강력과 약력이 관찰된다. 뉴턴이 중력을 발견한 지 400년밖에 되지 않았고 맥스웰에 의해 전자기학이 소개된 건 200년밖에 되지 않았다.
원자폭탄의 개발을 가져온 강력과 약력이 발견된 건 70년밖에 되지 않는다. 안다는 건 지식을 습득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안다는 것에 대한 개념조차 흔들리고 있다.
새로운 세상은 기존의 세상에 대한 개념만을 갖고는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안다는 게 무엇인지 아는 걸 고민하는 게 철학이다. 그래서 철학은 메타 학문이다. 과학은 어떠한 방식으로 성장해 가는가? 과학은 철학적 사유를 통해 성장해 간다.
메타 학문이라는 뜻은 학문 위에 학문이라는 뜻이다. 양자역학은 기존의 개념들을 붕괴시키고 재개념화하면서 탄생했다. 아인슈타인은 고전물리학과 현대물리학 경계선에 서 있는 경계인이었다.
그리고 그가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입자물리학으로 대표되는 현대물리학을 만들었다. 철학의 기본 쟁점은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인식체계를 붕괴시키는 데 있다.
가정을 건드려야 새로운 세계가 나온다. 새로운 지각이 열려야 다른 세계가 생긴다. 개념은 언어에서 출발했고 언어와 세계는 서로 대응한다. 개념의 한계는 언어의 한계고 세상의 한계다. 언어의 한계가 곧 세계의 한계다. 세계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고 세계를 넘어선 건 말할 수 없다.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만약 당신이 알고 있는 어떤 걸 말로 설명할 수 없다면 당신은 그걸 안다고 할 수 없다”
자연은 우리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기도 하지만 매우 단순하다. 우리가 자연을 복잡하다고 여기는 이유는 자연의 언어에 익숙지 못하기 때문이다. 파인만은 세계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자연이라는 여성은 단순하지만 대단한 미인이야.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인이지. 그녀와 데이트하고 그녀에게 빠져 깊은 사랑의 감정을 나누고 싶으면 그녀가 쓰는 언어를 구사할 줄 알아야 해”
양자역학은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긴 힘들지만 자연의 언어로는 가능하다. 파인만이 말한 자연이 쓰는 언어는 수학이었다. 과거의 모든 철학자는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다.
탈레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모두 수학자였고 근대 이후 철학자인 버트런드 러셀과 화이트헤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앙리 베르그송 역시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다.
아직 현재 인류가 발견한 자연의 언어 중 수학을 뛰어넘는 언어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양자역학을 직관적으로 설명할 수 없고 해석할 수도 없지만 자연은 수학에 의해 단순하면서도 아름답게 설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인만이 학생들에게 양자역학을 공부하기에 앞서 수학을 먼저 공부하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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